17 ¶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이르러 보니 거기에 많은 제자들과 함께 유다 각 지방과 예루살렘과 해안 지방인 띠로와 시돈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는 더러운 악령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그들도 고쳐주셨다. 19 이렇게 예수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와 누구든지 다 낫는 것을 보고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예수를 만지려고 하였다. 20 ¶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21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내어쫓기고 ⋅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럴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25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 너희가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이다. 26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와 사람들 한가운데 서 계십니다. 그분은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고, 우리의 고통과 희망, 그리고 아픔 속으로 직접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가치관을 흔들고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말씀을 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지금 주린 자들은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를 것이다.” 이 말씀은 단순히 상황이 역전될 것이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은 진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고 있으며, 세상의 권력과 안전을 우선하는 구조를 흔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자체가 선하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부와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을 열어 하나님께 기대는 이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임재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팔복의 말씀은 우리가 자신의 힘과 소유보다 하느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화 있으리라’라는 경고의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부나 기쁨을 거부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로부터 멀어질 위험이 있다는 점을 경고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며 살아갑시다.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하고, 세상의 가치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에 마음을 활짝 여는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이 짧은 설교는 영어 예배의 설교문입니다. 참고하시도록 원문도 올려 드립니다.)
The Blessings of Dependence: Embracing God’s Mercy and Wisdom
Today’s Gospel gives us a powerful moment. Jesus comes down from the mountain to be with the people in their struggles, hopes, and pain. He does not stay apart but steps right into their lives, speaking words that challenge, unsettle, and reshape our understanding of the world.
Blessed are you who are poor, for yours is the kingdom of God. Blessed are you who hunger now, for you will be satisfied. These words are not just about reversing fortunes but revealing a greater truth—God’s kingdom is already at work, disrupting systems that favour the powerful and secure.
Jesus is not saying suffering is good. He is showing that those who are open, vulnerable, and not protected by wealth and status can receive God’s presence most fully. The Beatitudes call us to trust in God rather than in our own resources.
Then come the ‘woes’—difficult warnings. Not because God rejects wealth or happiness, but because when we think we have everything, we risk shutting ourselves off from God’s mercy and justice.
Let us remember that we are passing through this fleeting world, fragile and dependent on God’s grace. May we live with gratitude for his mercy, opening our hearts to his compassion and wisdom that surpass the values of the world. Amen.
¶ 하루는 많은 사람들이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는 예수를 에워싸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2 그 때 예수께서는 호숫가에 대어둔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그 중 하나는 시몬의 배였는데 예수께서는 그 배에 올라 시몬에게 배를 땅에서 조금 떼어놓게 하신 다음 배에 앉아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께서는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 하셨다. 5 시몬은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하고 대답한 뒤 6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걸려들어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다. 7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같이 고기를 끌어올려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두 배에 가득히 채웠다. 8 이것을 본 시몬 베드로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베드로는 너무나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을 보고 겁을 집어먹었던 것이다. 그의 동료들과 10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똑같이 놀랐는데 그들은 다 시몬의 동업자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시몬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자 11 그들은 배를 끌어다 호숫가에 대어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얼마 전에 유튜브를 보니까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는 여자분 소개가 나오는데, 그분은 정말 살림을 깔끔하게 잘 하시는 거예요. 그분이 군인의 아내인데, 부대의 조그만 아파트이지만, 부대의 장교들 모임이 끝나면 사람들이 그 집으로 모인다고 해요. 언제 찾아 가도 항상 깨끗하고 넓고 그래서 간다고요. 저하고 비교를 해보니까 저는 그렇지가 못하거든요. 그래서 누가 온다고 그러면은, 열심히 치워야 되고, 그것도 한참 정리를 해야 하는 정도인데요.
여러분은 좀 어떠세요? 공동체 생활하시니까 아마 서로 왔다 갔다 하고, 그러니까 아무 때나 오고 가고 할 수 있게 깔끔하게 하시고 살 것 같은데요. 웃으시는 거 보니까 그러신 것 같아요.
아마 베드로의 심정이 그런 심정이었을 것 같아요. 자기가 이렇게 살고 있는 집에 갑자기 누군가가, 그것도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찾아오신다고 한 경우처럼, 베드로는 그렇게 당황을 한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귀염성이 있었던 것 같아요. 베드로는 고기를 잡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시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물 속에 뛰어들었다고 하지요. 또한 변화산상에서도 당황을 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로 ‘예수님, 우리 천막치고 여기서 계속 삽시다’라고 했던 것도 베드로였지요. 생각해 보면 수줍음도 많이 타고 좀 귀여운 행동을 많이 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오늘의 1독서(구약)를 보면, 그런 사람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라고 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도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느님의 제단 위에 천사들이 날아다니면서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외치는 하느님 현존의 신비를 마주한 그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사는 사람인데 하느님을 봤다니 이거 죽는 거 아니야’ 이러면서, 허둥대었습니다.
그런데, ‘주여, 내게 오심을 감당치 못하니’ 하며 당황했던 이 두 사람들의 응답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갖고 있는 배와 그물, 전 재산을 다 물가에 놔둔 채로 예수님이 따라갔습니다. 이사야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도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그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시기에, 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새로운 길로 인도하는 그런 어려운 일을, 감당하겠다고 이렇게 하느님 뜻에 승복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역사에 이사야나 베드로와 같은 시대에 그런 처지에 있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을 해보면, 여러분들은 그 베드로나 이사야보다는 훨씬 더 잘 하셨을 거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런데요.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우리가 예수님이나 하느님을 그렇게 볼 수 있는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 한번 여쭤보고 싶습니다. 그런 신비를 체험한 적이 있습니까? 오늘 베드로와 이사야가 겪은 것 같은 신비의 체험을. 저도 이제 생각을 해보니까 참 그런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스스로, ‘관상기도를 열심히 한 사람도 아니고 또 금욕적으로 이런 사람도 아니고 신비 체험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와 이사야의 경우도 그 사람들이 노력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느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베드로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께서는 만난 모든 사람들을 불러 주셨는데, 대부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채리지 못했는데, 그것을 알아채렸다는 점에서 베드로(와 이사야)의 특별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런 게 있지 않나 궁금히 생각해 봤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매일 아침 태양이 떠오를 때마다 그런 생명과 소명이 우리에게 오고 있지 않나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성가 102장에 새 아침마 밝아 종달새 우네 그런 노래 있죠. 그래서 주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그 첫날, 첫날에 찌르레기가 우는 것 같은 그 소리를 오늘 아침에 듣는다 이런 가사로 시작하는 그 노래인데요. 우리들의 매일 아침마다 우리가 이런 베드로가 하느님을 만나고, 이사야가 하느님을 만나던, 그 신비가 우리들에게, 임하실 줄 믿습니다.
그 신비는 주님의 현존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매일 아침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성찬의 식탁에 나올 때마다, 숨쉬는 시간마다, 우리들에게 힘을 내라고, 그리고 또 지치지 말라고,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으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은, 사람들과, 금전과, 또 건강 문제와, 꿈과, 이런 모든 것이 실타래처럼 얽힌채, 우리를 흔들고 지치게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주님의 손길을, 오늘의 베드로와 이사의 말씀 속에서, 묵상하면서 그 사람들처럼 새로운 힘을 주님에게서 얻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2 ¶ 그리고 모세가 정한 법대로 정결 예식을 치르는 날이 되자 부모는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23 그것은 “누구든지 첫아들을 주님께 바쳐야 한다.”는 주님의 율법에 따라 아기를 주님께 봉헌하려는 것이었고 24 또 주님의 율법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정결례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었다. 25 ¶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성령이 머물러 계셨는데 26 성령은 그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죽기 전에 꼭 보게 되리라고 알려주셨던 것이다. 27 마침내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에 들어갔더니 마침 예수의 부모가 첫아들에 대한 율법의 규정을 지키려고 어린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리고 왔다. 28 그래서 시므온은 그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29“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30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31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32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33 ¶ 아기의 부모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을 듣고 감격하였다. 34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아기는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35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36 ¶ 또한 파누엘의 딸로서 아셀 지파의 혈통을 이어받은 안나라는 나이 많은 여자 예언자가 있었다. 그는 결혼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같이 살다가 37 과부가 되어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로써 하느님을 섬겨왔다. 38 이 여자는 예식이 진행되고 있을 때에 바로 그 자리에 왔다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이 구원될 날을 기다리던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의 이야기를 하였다. 39 ¶ 아기의 부모는 주님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다 마치고 자기 고향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날로 튼튼하게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었다.
오늘 복음서에서 묵상한 ‘성 시므온 성가’는 30년 전 신학교 채플에서 매일 까만 옷을 입고 동료들과 저녁 때마다 드리던 기도의 시간을 떠오르게 합니다. 우리는 매일 저녁마다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주의 종을 평안히 돌아가게 하시는도다. 주께서 만민 앞에 세우신 구세자를 내 눈으로 친히 뵈었나이다. 이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시요 이스라엘의 영광이로소이다.
매일 저녁 시므온 송가를 부르는 이 전통은 수도자들의 저녁 기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 시간에, 하루의 일상생활에서 만난 주님을 감사하며, 휴식을 준비하는 고요한 이 노래는 우리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 줍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인생을 마감하는 엄중한 시간에도, 그동안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이런 평안한 노래를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영광스러운 축가를 부른 시므온은, 근심어린 어조로 ‘가슴을 찌르는 고통’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감탄과 염려가 공존하는 순간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삶은 축복과 고난, 생명과 죽음이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 뿐 아니라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오래 전에 15일 피정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조용히 있다 보니, 더욱 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게 되고, 그러고 보니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인생의 회한과 아쉬움이 떠올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의 인생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인생이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 그런 눈으로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또한 가까운 분들의 인생 속에도, 기쁨과 영광의 순간과 함께, 회한과 억울함과 고생의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고생을 많이 하며 살았던 아버지, 어머니의 기억을 되살리다가, 그 나이를 보니 30대 밖에 안 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감사한 세월이었지만 또한 세상의 물결 속에서 고생한 세월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곳에 함께 하신 여러분의 인생은 어떠했나요? 어떠한 기분으로 보았는가에 따라서 아쉬움과 감사가 교차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을, 오늘의 본문을 묵상하며 하게 됩니다.
신앙의 눈은 이러한 흙과 같은 인생의 진실과 연약함을 직시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걱정과 연약함을 주님께 고백하고, 시므온과 안나처럼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은 인내와 희망의 혼합물입니다. 인내는 고통을 참는 것입니다. 영어에서 환자라는 단어가 ‘인내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라고 한 내용은, 원래 ‘이스라엘의 위안’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고난과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추운 겨울에 오지 않는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떨고 서 있었는데, 결국 멀리서 오고 있는 버스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인내와 희망은 상황을 극복하는 힘이 됩니다. 그렇게 기다림으로 주님의 구원, 주님의 위안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허약한 자기 연민과 회한을 넘어서야 합니다. 신앙인은, 후회하고 절망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사하고, 극복하고, 초월하고, 싸우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고비길에 지금 어떤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까? 지금 어려움이 있더라도, 심지어, 죽음의 엄중한 고난이 앞을 가려도, 우리는 시므온과 안나처럼, 희망을 품고 기다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기다림의 끝에 ‘이제 이 종을 평화 가운데 나아가게 하시나이다’라고 하는 겸손와 감사의 신앙생활에 더욱 깊이 이르기를 바랍니다.
14 ¶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셨다. 예수의 소문은 그 곳 모든 지방에 두루 퍼졌다. 15 예수께서는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셨다. 16 ¶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난 나자렛에 가셔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서를 읽으시려고 일어서서 17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는 대목을 펴서 읽으셨다. 18“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19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들던 사람에게 되돌려주고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예수에게 쏠렸다. 21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
열심히 하려고 하면 더 안 되는 게 많이 있습니다. 노래 부를 때도 제가 열심히 하려고 목에다 힘을 주면 목소리도 잘 안 나고요. 자연스러운 울림도 안 나고 또 글씨도 제가 꽉꽉 눌러서 쓰는데 꽉꽉 눌러서 쓰다 보면 글씨가 참 더 엉터리가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슥슥 문질러지게 쓰면 훨씬 더 잘 써지는 것 같습니다. 악기도 그렇게 약간 뿌연 소리를 내려고 하면 오히려 명쾌한 소리를 내려고 할 때보다 더 풍성한 소리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설교도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준비가 너무 안 돼 있어도 문제지만 너무 과해도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설교로, 딱 한 줄 설교를 하셨는데, 정말 그렇게 장황하지 않은 설교를 준비하려고 해도 자꾸 욕심이 생기고 자꾸 태도가 경직되는 것을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복음 선포가 무엇입니까? 고대 사회에서는 주로 새로운 왕조가 형성됐을 때 그 왕조의 수립의 정당성을 얘기하거나 앞으로 이런 식으로 정책이 바뀔 거라든가 이런 것들을 담고 있는 게 선포였죠.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3.1독립선언이 하나의 선포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일본천왕이 항복선언하는 거 라디오에 나오는 거 나오잖아요. 또 예를 들면 대한민국 초기의 토지개혁 법령도 그런 예이지요. 동북아시아가 굉장히 근대화가 빨리 이루어졌는데 그 초석이 되는 토지개혁령이 발표되는 순간, 토지소유에 대한 원칙이 확 바뀌어가지고 경자유전으로 돼서 엄청난 큰 변화가 일어나죠. 이런 것들이 바로 선포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또 저희가 있었던 건 우리가 잠을 못 자면서 봤던 계엄무효선언 이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선포의 내용들인 것 같아요.
그래서 선포라는 것은, 적어도 저희가 주일날 교회마다 가서 10분 20분 또 길게는 40분 50분 들어야 하는 그런 지루하고 졸리는 종교적인 설교가 그런 선포는 아니었던 것 같고, 더 역동적이고 뭔가 좀 파괴력이 있는 그런 것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선포는 굉장히 간단합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냐면 오늘 이 성서의 말씀이 너희들 가운데 이루어졌다 라고 얘기하는데. 그건 뭐냐면, 갇혔던 사람들이 자유롭게 되고 억눌린 자가 자유로웠고 배고픈 사람들이 배부르게 되고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날이 돌아온다라고 하는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얘기인데 사실은 이게 예수님의 회당에서 자리에 앉으셔서 얘기하신 이 내용은 마치 새로운 왕조를 형성한 왕이 이런 원칙으로 내가 다스리겠다라고 하는 하나의 왕위 즉위, 왕조 수립의 선언을 하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법적인 강제력이 생긴 다음에 법에 대한 선포를 하는데 예수님의 방법과, 성경에 나온 방법들은 그 반대 방향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먼저 그 법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먼저 생겨나고 변화는 그것에 뒤따라오는 식으로, 그렇게 모든 것들이 바뀌어 나갑니다. 마치 홍해가 갈라진 다음에 건너가야 되는데, 홍해가 갈라지기도 전에 몇몇 사람들이 그쪽으로 전진해 들어갔을 때 나중에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것이죠.
굉장히 무모해 보이고 약해 보이지만, 그것으로 서양사가 전체가 바뀌고 인류에서 굉장히 소중한 유산들이 기독교를 통해서 나온 걸 보면 이 방법이 굉장히 획기적인 방법인 것 같습니다.
요즘에, 그에 비해서, 언론에는 기독교가 그렇게 안 좋게 비춰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동안 기독교가 이 세계에서 한 공헌이 많은데, 요즘 들어보면 너무 창피한 얘기가 많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히틀러 같다고 그러고 어떤 사람은 모택동의 행동대 홍위병 같다고 그러고. 오늘의 한국의 법률과 경제와 윤리와 정치와 문화는 굉장히 세련되고 고급스럽습니다. 고도화된 질서와 의사소통 방식으로 사회가 운영되고 있는데, 거기에 굉장히 야만적인 사람들, 폭력 만능주의, 반지성주의를 가져온 사람들에 대한 명단에, 기독교의 목사, 기독교 전도사들이 따라 붙는 것 같아요.
옛날에 제가 처음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복사기들이 좀 후져가지고 복사가 안 되면 주먹으로 팡팡 때려가지고 복사를 하고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는데 요즘에 몇 천만 원, 몇 억 원 하는 고급 장비와 컴퓨터 시스템이 잘 안 돌아 간다고 해서 주먹으로 막 치는 사람이 있으면 아마 해고가 될지도 모르겠죠. 그러한 폭력지상주의 이런 것들하고 기독교가 이렇게 연결되는 것은 왜인가라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한다고 하면 알맹이 딱 빼고,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명령한다고 하는 그 껍데기만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얘기하신 어조는 주로 친구와 같은 톤으로 얘기를 하셨지 로마 집정관이나 장군의 포고문과 같이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거 몇 번 안 되죠? 오늘 본문에서 나온 선포를 하셨고, 하느님 나라의 원리로 팔복을 선언하셨고, 그 나머지는 다 친구로서 이야기를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셨던 것을 우리가 압니다.
이대용 주교님이 옛날에 설교는 공동체의 대표 간증이다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간증이 뭡니까? 그냥 일반인으로서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을 나누는 거죠. 그래서 굉장히 그 말이 요즘에, 굉장히 다가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이 사회에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오히려 그 저변을 감싸는 우리의 대부분의 말은 따뜻함과 사랑과 공감과 그런 동등함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너무 일방적인 문화에 익숙해져 있어서 듣는 사람이 잘 생각할 수 있는데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다 구원을 못 받고 무식한 사람들이라 우리가 가르쳐줘야 돼 라고 하는 그런 오만한 태도를 우리들의 마음속에 내면화시켰기 때문에, 요즘에 우리 기독교가 제일 어떤 의미에서는 이 사회의 사고지구로 되지 않았나 하는 그런 반성을 해보았습니다. 듣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예수님의 소통 방식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았나 스스로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과 느낌을 존중하였던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의 법으로 우리의 공동체를 새로 만들어가고 우리들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우리들의 문화를 바꿔 나가야겠습니다. ‘이 사랑과 포용의 선물이 여러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예수님의 자비하신 선포를 내면화합시다. 이 선언이 우리들 가운데 변화를 가져와서, 한 사람 한 사람들의 생활에 새로움을 가져올 것을 믿습니다.
¶ 이런 일이 있은 지 사흘째 되던 날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다. 그 자리에는 예수의 어머니도 계셨고 2 예수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초대를 받고 와 계셨다. 3 그런데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다 떨어지자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렸다. 4 예수께서는 어머니를 보시고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5 그러자 예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일렀다. 6 ¶ 유다인들에게는 정결 예식을 행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그 예식에 쓰이는 두세 동이들이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7 예수께서 하인들에게 “그 항아리마다 모두 물을 가득히 부어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여섯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자 8 예수께서 “이제는 퍼서 잔치 맡은 이에게 갖다 주어라.” 하셨다. 하인들이 잔치 맡은 이에게 갖다 주었더니 9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변해 있었다. 물을 떠간 그 하인들은 그 술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고 있었지만 잔치 맡은 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술맛을 보고 나서 신랑을 불러 10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는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다음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 법인데 이 좋은 포도주가 아직까지 있으니 웬일이오!” 하고 감탄하였다. 11 이렇게 예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제가 신학교 1학년 들어갔을 당시 신학과에는 항상 1학년들이 논쟁이 있어요. 술을 마셔도 되는지 안 마셔도 되는지.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보수교단에서 왔기 때문에 술 마시는 거 굉장히 좀 싫어했는데 어떤 선배들은 술을 마시면 어떠냐고 도전을 하곤 하였죠.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 아무튼 술을 만든 기적이라고 하는 걸 보면, 예수님이, 어떤지는 몰라도 술을 안 마시는 분은 아니신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누가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 빵과 포도주는 우리나라에서 밥과 국하고 비슷하다. 그래서 그냥 제일 간단한 거 먹는 기분이 그런 거다 이렇게 얘기는 하더라고요.
이 구절을 보면서 항상 생각나는 것은, 비틀즈의 ‘렛잇비’가 생각이 나는데요.
렛잇비: 그냥 그렇도록 두어라,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무엇이든지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여라’ 이렇게 번역이 됐네요. 작가는 당시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 굉장히 죄책감도 느끼고, 막 그 절망에 빠졌는데, 하루는 그 어머니가 마리아의 모습으로 꿈에서 나타나서 그런 얘기를 했죠.
네가 할 수 없는 것들 가지고 고민하고 슬퍼하고 그러지 말고, 하느님께서 이 세계를 움직여 가시는 것을 봐. 그냥 놓고 봐. 네가 다 하려고 그러지 말고 이렇게 지혜로운 언어를 가르쳐줬다고 한 그 가사가 이 구절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얘기를 듣고 제가 굉장히 깜짝 놀란 적이 있었어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들이 굉장히 많지만, 사실은 이 세상이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도 많고 또 때로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들이 많고, 그런 것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선물로 다가오는 것을 우리가 보기는 보곤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그런 강박관념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교회가 오늘 교회의원회 저희가 했어요. 그래서 우리 교회의원님들이 작은 교회의 살림이지만 밖에 있는 뭔가 돕는 일을 선교를 열심히 하자. 그래서 선교에 대한 의논이 굉장히 많이 됐었거든요. 그래서 아무튼 그 교회도 외부에 선교를 많이 했는데 하면 할 수 없이 진이 빠지는 거예요. 해도 해도. 계속해서 할 일이 생기고 계속해서 다급한 일이 생기고. 그래서 그 어느 한 해는 거기에 그 신부님이 “우리 그러면 다 이거 중단하자. 중단해도 하느님께서 그 도와야 할 가난한 나라, 거기서 활동하고 계셔. 우리가 돈을 내야지만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게 아니야.” 이렇게 해서 한번 끊고 생각을 해봤더니 나중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그랬더니 나중에는 할 수 있는 만큼을 하다 보니까 전보다 더 많이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외부에 대한 활동을 할 때 기억하여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미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과 우리는 감사하면서 그것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시중 드는 정도로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좋다고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논의가 앞으로 하면서 많이 됐으면 좋겠지만 우리가 세상에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동력자로 참석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잘 시작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런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인간 생활을 하다 보면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아요. 우리는 또 상당히 기독교는 합리적인 사고를 중시하던 근대의 영향이 많아서인지, 무엇이든 매뉴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밥을 말아먹으면 밥을 이만큼 말아먹는 게 좋을까 그렇게, 매 순간순간에 이게 뭔가 매뉴얼에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교회 운영에서 만나는 사안들에 대해서도 분명히 어떤 규정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외부적인 어떤 척도를 계속해서 고민하는 적이 많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그러한 척도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이 느끼는 아주 미묘한 예와 아니오 사이에 있는 미묘한 그러한 느낌의 차이가 굉장히 중요한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는 명확하고, 예냐 아니오냐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순간에 우리들의 내면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재능에 의해서 느끼는 그런 미묘한 마음에 있는 것도 우리가 알게 됩니다. 현대까지는 복잡하거나 단순하거나 어떤 답이 정해진 경우가 많은 시대에서 살아왔지만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전혀 전에도 보지 못하고 복잡한 것들이 많이 있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들에게 맞는 진리에 대한 관점은 어떤 명시적인 어떤 말로 이루어진 그것들에 앞서서, 나 스스로가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에 더 초점을 맞추는 그런 신앙으로 우리들의 윤리와 도덕과 신앙의 교리가 변해갈 시대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 여기에서 나누는 짧은 짧은 서로의 대화와 일상에서 나누는 느끼는 하나하나의 교환 속에서, 더욱더 수준이 높아지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진리가 그러한 주님께서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활동하시는 그 속에서. 더욱더 우리들에게 잘 나타날 수 있는 그러한 깨어있는 우리들의 한 순간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어떤 재판관 같은 명료한 사고에서 한층 더 나아가, 예술가 같은 감성으로 승화된 진리 추구입니다. 서로 일상생활에서 겪는 미묘한 느낌들을 신뢰하고 나눌 수 있는, 그런 공동체로서, 우리들의 한 해를 잘 개척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15 ¶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던 터였으므로 요한을 보고 모두들 속으로 그가 혹시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러나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머지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그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17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 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 21 ¶ 사람들이 모두 세례를 받고 있을 때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고 계셨는데 홀연히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에게 내려 오셨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수님에 대한 복음 메시지에서는 시편의 노래와 춤이 배경음악처럼 흐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신 말씀은 시편 22편의 울림을 저희에게 전해 줍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들러온 ‘너는 내 아들이다’라는 말씀은 이사야 43장의 울림을 불러 일으킵니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성서 시대에 가까웠던 예수님 당시의 독자들은 마치 우리가 트로트나 K 팝 가사들을 알듯이 이 곡조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1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건져주지 않았느냐? .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람이다. 2 네가 물결을 헤치고 건너갈 때 내가 너를 보살피리니 . 그 강물이 너를 휩쓸어가지 못하리라. 3 나 야훼가 너의 하느님이다. .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내가 너를 구원하는 자다. . 이집트를 주고 너를 되찾았고 . 에티오피아와 스바를 주고 너를 찾아왔다.
우리도 그런 떠올릴 노래가 있습니다. 저는 ‘힘들고 지쳐’로 시작하는 찬양곡을 알고 있습니다.
당시 공화정은 세습을 방지하기 위하여 로마 집정관 또는 대통령 후계자를 다른 집안에서 데려오는 관례를 유지했는데, 그 후계자 지명식에서, 이 사람은 나의 아들이다, 나의 딸이다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런 존귀와 권능을 지니셨다면, 우리도 그와 같은 존귀와 힘을 갖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 곡은 소리쳐 외치는 ‘락’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락 스피릿’에 대하여 ‘자신을 지탱해 온 힘’이자 ‘자신의 피를 끓게 만드는, 용암처럼 뜨거운 무언가’라고 했습니다(인용: “락스피릿이란 무엇인가” ohdeok). “클래식에도, 발라드에도, 재즈에도, 고3 수험생에도, 월급쟁이에도, 실망한 사람에게도 있는,” 이 도전의 힘이, 예수님 세례를 형상화한 이 곡 속에도 느껴집니다.
이러한, 죽음의 물에서 나와 의연히 서 계신 예수님과 같은, 변화의 힘, 분출하는 끈기와 생명력이 여러분의 한 해에 충만하기를 빕니다.
10 ¶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 12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14 ¶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15 ¶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치기를 “그분은 내 뒤에 오시지만 사실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한 말이다.” 하였다. 16 ¶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 17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18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주셨다.
올해 새해 첫 예배인데 이 새 예배를 요한복음 1장으로 시작하니까 너무 감회가 새로운 것 같아요. 전에 요한복음 1장이 화려하게 적힌 액자가 있어서 알아 보았더니, 오래 전 라틴 전례에서는 미사가 끝날 때마다 사제가 제대 위에서 요한복음 1장을 읽었다고 합니다. 성육신의 신비를 신자들과 함께 묵상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요한복음 1장의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정말 기쁜 소식과 신앙의 진리를 정말 깊게 담고 있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하느님의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직접 오셔서 정말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맡겨주셨습니다. 성육신의 신비 또는 강생의 신비가 얼마나 우리들에게 큰 기쁨인가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것 같아요.
누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개신교는 공생애의 종교다 이렇게 얘기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같이 제자들과 사람들과 함께 시련도 당하시고 어려움도 겪으시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시는 거기에 굉장히 초점을 나누고 있다고 한다면.
정교회는 부활의 포커스가 있다 이런 얘기를 해요. 그래서 부활에서 정교회는 굉장히 부활심장이에요. 부활심장이 중요하고 승리하신 그리스의 영광에 굉장히 초점이 맞춰져 있죠. 그래서 러시아 대문호 중에 부활이라는 글을 쓰신 분도 있고 그런 게 굉장히 우연이 아니다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리고 가톨릭에는 뭐가 포커스냐 그러면 굉장히 고난에 초점을 맞춰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 그리고 거기서 온 세상의 인류를 위해서 고통을 받으신 주님 앞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이렇게 들었어요.
그에 비해서 성공에는 어디에 초점이 있냐 라고 하면 어디에 있는 것 같아요. 이 성공에는 대단히 성육신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이렇게 오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 우리 성공회에서는 이 성탄절기와 이 공연절기가 또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예수님의 입장에서 하느님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이곳에 내려오신 성육신이지만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것은 성화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정말 이 미천하고 정말 하느님도 알 수가 없고 정말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하느님께 오심으로써, 저희들이 거룩하게 되는 그런 역사를 정말 우리 입장에서는 얘기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기도를 많이 하신 분들이 그 얘기하시는 거는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과정을 몇 단계로 얘기하죠. 그래서 처음에는 깨끗하게 하신다고 그러죠.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옛날에 나쁜 짓 한 거 나쁜 생각 한 거 이런 걸로 어지러워 걱정 근심 이런 걸로 어지러워져 있는 우리들의 생각을 하느님께서 하나하나 이렇게 만지셔서 좀 가라앉게 해주시면.
그 다음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비춰주신다고 그래요. 그래서 우리들 마음을 이렇게 착 비춰주시면 이것이 무엇이 진리였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고 이런 걸 알게되지요.
알게 되면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거룩하게 만드셔서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는 거룩한 사람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신다고 해서 이 성화를 마지막 단계로 하죠.
근데 그것이 어떤 단계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고 해요. 그래서 거꾸로 되는 경우도 있고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만 그냥 우리가 인식의 순서로는 정화시키시고 우리들을 밝은 빛으로 비춰주시고 우리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으로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들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들의 성화, 우리들의 미천하는 우리들을 당신의 뜻으로 거룩하게 하는 그런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 우리 서방교에서는 성화인데 정교에서는 또 좀 다르게 얘기해요. 정교에서는 신화라고 해요. 인간을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신다고 하였지요. 인간이 하느님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이 거룩하게, 그 하느님. 그 높은 곳으로 하느님의 뜻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주셨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굉장히 탁월한 통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궁금해가지고 뉴스를 봤어요. 유튜브를 봤더니 밤새도록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은박지 같은 거 이렇게 하고 거기서 새벽 3시인데 거기서 새고 있는 게 나왔어요. 길에서 막 거기서 은박지 덮고 자고 그래서 너무 또 미안하기도 하고. 다 보니까 어리고 그래서 아휴 정말 나는 여기서 편안하게 이렇게 자고 일어나는데 정말 저런 사람들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어떤 고등학생이 한 얘기가 생각났어요. 자기네 엄마는 이찌기고 태극기 부대고, 자기 증조부는 친일파여 일본 순사랑 같이 막 웃으면서 사실, 손짓고 그렇지만 나는 그래도 여기에서 나와서 우리나라의 밝은 내일을 위해서 힘을 합치고 싶다 그리고 이것을 감추고 싶지만 감추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면서 우리의 미래를 더 좋게 만들겠다 이렇게 얘기하는 걸 보면서 감탄했어요.
아 그래, 우리가 남자 여자로 갈리고 나이대로 갈리고 빈부로 갈리고 그렇지만 그런 것을 어느 순간에 다 뛰어넘어서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멋있는 힘이 우리들 속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거 굉장히 불교적인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다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서로 다 연관이 되어 있고 그래서 더 높은 그런 내 작은 나가 아니라 더 큰 나로 나아간다라는 생각을 하니까 멋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서의 진리는 모두 이러한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어, 다른 사람의 고통과 갈망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이지요. 오늘 읽은 말씀 구약에 말씀이 선포된 것도 사실은 노예생활의 그 어려움 속에서 그 반추로부터 나온 것이고 또 메시아를 기다렸던 그 갈망도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하는 그 어려움 가운데서 나온 것이지요. 또 그리스도가 오시는 걸 기다렸던 그 수많은 마리아나 그런 데 나온 것이고 그들의 그런 역사로부터 나온 것이지요.
오늘 우리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열망하는 그것도 옛날에 서울의 봄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통해서 본 우리가 저런 어두운 그런 것들을 다시 돌아가면 안 된다는 그 어두움에 대한 그런 성찰로부터 이 밝음과 한 단계 높은 것으로의 길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제 새해가 됐는데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면 정말 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런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고 힘들 것도 있어요. 그런데 옛날에 곤도마리에인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집안을 정리하면서 많이 버리라고 그러잖아요. 버릴 때 이렇게 버리지 말고 버리는 그 물건한테 고마웠다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 그러면서 버리라는 거예요.
어쩐지 그게 좀 어리석은 일인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래요. 버리는 것도 그냥 확 이렇게 버리지 않고 그렇게 버리려면 좀 뭔가 마음에 더 못 버리는데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 그러면서 버린다고 하는 그 마음이 더 잘 버릴 수 있고 내 마음을 또 버리는 나의 이런 마음을 달래주는 면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난 한 해를 우리가 돌아보면서, 또 여러 가지 안 좋은 일도 있고 그래서 그것을 또 버리려는 마음, 새로운 것을 바라는 마음도 있겠지요. 하지만 성경에 나온 많이 기다렸던 사람들처럼 지난 우리가 살아왔던 그 과거를 정말 감사하면서 그 소원에 우리의 모든 소중한 순간들과 소중한 희망들을 다시 잘 추려서 밝아오는 이 해에 우리가 맞이해야겠습니다.
이 하느님의 진리가 우리가 알 수가 없죠.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알기 쉽게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 진리는 무엇입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겁내지 말고 하느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다. 또 미천한 우리들을 그 하느님의 높은 뜻에 그 우주적이고 커다란 그 따뜻한 꿈속에 우리들을 동참시킨다고 하는 그런 막연하지만, 실낱같은 성육신의 희망을 일깨워주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희망으로 오늘 이 시간의 기도를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41 ¶ 해마다 과월절이 되면 예수의 부모는 명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는데 42 예수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명절의 기간이 다 끝나 집으로 돌아올 때에 어린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의 부모는 44 아들이 일행 중에 끼여 있으려니 하고 하룻길을 갔다. 그제야 생각이 나서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찾아보았으나 45 보이지 않으므로 줄곧 찾아 헤매면서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갔다. 46 사흘 만에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거기서 예수는 학자들과 한자리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는 중이었다. 47 그리고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지능과 대답하는 품에 경탄하고 있었다. 48 그의 부모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예수를 보고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49 그러자 예수는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50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52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
아이들이 길을 잃는다는 것은 아이 자신과 부모들에게 모두 충격적인 상황입니다. 제 친구 중에 하나가 어렸을 때 길을 잃어버렸던 이야기를 하는데요. 그러니까 어머니 아버지하고 손을 놓치고 길을 잃어버려서 이쪽에 있는 소도시에서 저쪽에 있는 소도시까지 울면서 걸어갔대요. 그 고속도로를 따라서. 그동안에 이제, 집에서 막 찾고 난리가 났었죠. 근데 아이들은 길을 잃어버리면 그냥 앞으로만 간다고 그러더라고요, 울면서요. 그래서 그렇게 먼 길을 밤새도록 이렇게 걸어갔었던 그 얘기를 하는데, 그 아이는 얼마나 놀랐으며 그 부모는 얼마나 놀랐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도 사실은 공항에서 제가 영국으로 출장하는 날인데 잠깐 이렇게 딴 데 보고 있는 한 1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애가 없어져서요. 그날 출장할 비행기는 떠야 되는데 애는 2층, 1층 다 뒤져도 없고. 그래서 출장을 취소할 때쯤 됐을 때 어디서 전화가 온 거예요. 얘도 비슷하게 울면서 앞으로만 가다가 다행히 옆에 있는 어떤 아저씨한테 핸드폰을 달라고 해서, 전화를 한 거예요. 그래서 찾았던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도 어렸을 때 오늘 성경말씀 보면, 그렇게 좀 부모가 길을 잃어버린 얘기가 나와요. 근데 이게 이제 유태인들은 어떻게 되어 있었냐면. 그 당시만 해도 명절날(유월절)이 되면 다, 우리가 명절에 고향을 찾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예루살렘에 모여서 예루살렘에서 같이 예배를 하고 거기서 순례를 하고 집으로 가게 되어 있었고요. 요즘에 가족이 그냥 다 핵가족인데 그 당시만 해도 큰 친척들이 같이 내려가니까 애들은 애들끼리 막 사촌들하고 같이 해가지고 내려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 어디엔가 있겠지 그러고 내려가다가 나중에 알게 된 거죠. 그래서 이 부모가 그 길을 거슬러서 올라오면서 그 인파가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거 계속 걱정하면서 이거 우리 애기 완전히, 지금 엄만한, 아빠 혹시 얼마나 지금 그러고 있을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그런 것을 한 게 마리아가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왜 우리를 애태우르냐. 널 찾느라고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이런 얘기가 그래서 나오는 얘기죠.
그런데 오늘 이 장면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많이 들었어요. 우리가 하느님께 충실하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일관성 있게 살아야겠다고 열심히 살아가는데 인생을 살다 보면 그 전제 그렇게 열심히 이쪽으로 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하느님이 원했던 방향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라는, 그런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유치한 예를 들면, 제가 사제로서 30년을 살고서 하느님 앞에 섰더니, 그래서 ‘하느님이 전 열심히 주님의 일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하면요. 그런데, 그런 비유가 있죠. ‘나는 네가 뭐 했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나오잖아요. 그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이 방향으로 한다고 했던 그것 자체도, 하느님께서 ‘그것도 아닐 수도 있어’ 라고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통해 보았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안전하게 잘 보살피고 양육하는 것이 최고의 의무이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 당신은 그보다는 ‘이스라엘이 갈 길과, 이 인류가 앞으로 어떻게 가야 될 것인가’를 거기에서 같이 의논하고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하시는 거죠. 이러한 이 괴리감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느낄 때가 많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우리들에게 오는 축복들도 너무나 우리가 기대하지도 못했던 큰 축복들이 우리들에게 정말 아무 값 없이 주어지는가 하면, 또 우리가 누렸던 그런 것들이 어느 순간에 또 위협을 받거나 사라지게 되거나 또한 이 세상을 떠나야 되는 그런 상황을 만났을 때 우리는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굉장히 마리아와 요셉처럼 큰 축복을 누리는 생활 속에서도, 질문과 곤경에 빠지게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 엄무광 선생님의 ‘향심기도 강연’ 테이프를 듣고 있는데, 계속 내려놓는 훈련을 시키더라고요. 그분은, 생각들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기도할 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자꾸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내려놓는 연습을 하라고 하는 데요. 그 이유는, 우리가 가장 중요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도, 하느님 앞에서 내려놓을 수 있고 상대화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우리가 항상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끊임없는 충실함으로 나아가되, 주님 앞에서 그 또한 내려놓으라고 했을 때는 기꺼이 내려 놓을 수 있는 지극한 충실함으로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될 것은 이 신실함과 같은 말이 끊임없는 사랑이라고 하는데요. 변함없는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 신실하신 하느님의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항상 마음 아파하시고 정말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는 주님의 신실하심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함께 모여서 예배를 준비하면서 조금 일찍 오신 분들과 나눈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난해가 너무 어려운 한 해였고 너무 위험한 것도 많은 한 해(제주항공 폭발 사고 등)였는데 앞으로 오는 해도 좀 걱정이 된다. 어떤 분이 그러셔서 우리가 좀 서로 그래도 우리 새로운 해를 희망으로 맞이하자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이런 뜻밖의 일들을 만나고 그렇지만 우리가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끊임없는 사랑, 신실하심, 하느님의 그런 자비하심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가야겠습니다.
우리 앞에 어떠한 기쁜 일과 슬픈 일과 어떤 소망과 또는 절망이 닥치더라도 항상 그러한 신실함을 귀히하고 꾸준히 살아가는 우리 한해가 지난 2024년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 동터움을 느끼고 그런 새해를 맞이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39 ¶ 며칠 뒤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걸음을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를 찾아가서 40 즈가리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을 드렸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에 그의 뱃속에 든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 42 큰소리로 외쳤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43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44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45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46 ¶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47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 이 마음 설렙니다. 48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 주님은 거룩하신 분, 50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51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53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54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55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56 ¶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에서 석 달 가량 함께 지내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안녕하세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이콘 중에 하나가 성모 왕문 – ‘성모께서 엘리자벳을 방문하시다’라는 이콘이에요. 나이 많은 여자 한 분과 나이 젊은, 파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가 서로 손을 맞잡는 그 그림이 저는 참 좋더라고요. 당시에 마리아로서는 예수님을 잉태하는 것 자체가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가 없는 그런 기적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이게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을 거예요. 이미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에게 얘기할 때, ‘은총이 가득하신 이여’ 이런 얘기하잖아요. 그게 사실은 그 당시에 굉장히 귀족층이라든가 왕족 이런 사람들한테 붙이는 칭호래요. 그런데 그냥 갈릴레아 뭐 이런 데 살고 있는 그냥 시골에 있는 젊은 아가씨한테 천사가 나타나서, 마치 저기 고위층에게 얘기하듯이 은혜를 가득히 받으신 이어 이렇게 얘기하니까, 마리아가 그때 굉장히 깜짝 놀라면서 그 이야기를 들었죠.
하지만 인간은, 천사의 계시도 필요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들의 인정과 공감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엘리자벳도 그 당시에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아이를 갖게 된 가졌잖아요. 그래서 그 얘기를 듣고 나하고 비슷한 사람이니까 나에게 뭔가 위로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있겠다. 그래서 찾아갔었을 것 같아요. 산동네에 살고 있는 엘리자벳에게 찾아가서 여기 보면 세 달 정도 있었다고 해요. 그 당시에 사회에 그걸로 봐서는 제 약혼한 상태인데, 일찍 임신한 것이 금기시되고 그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아기가 낳을 때까지 거기에 오랫동안 머물렀죠.
그렇게, 우리 인간은 살면서 정말 어떤 그런 공감과 옆에 있는 사람들이 ‘괜찮아’라고 이야기 해 주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참 그런 기억이 어렸을 때 있었나 생각을 해보니까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정말 그런 분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전학을 가면서 굉장히 많이 위축이 돼 있었고 그 당시 학급이 60명 70명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학생들 한 명 한 명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기가 어렵고, 저는 주로 야단을 많이 맞고 살았는데 5학년 때 선생님은, 잘한 것 같지도 않은데, ‘야 너 참 잘했다’ 이렇게 몇 번 해주셨어요. 그런데 그게 저한테는, ‘그래도 우리가 선생님이 좋아하는구나’ 이런 느낌을 가져서 그때 좀 자신감도 생기고 학교에 가는 것도 더 좋아졌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기억에 나는 걸로는 몇 번 되지 않지만 그 짧은 그런 몇 마리가 힘을 주었어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남의 짐을 져주기는 정말 어렵고 자기의 그런 짐을 지고 가기도 벅차지만, 그 중에 조그만 무언가를, 다른 사람에게 한 5천 원어치라도 던져 줄 수 있으면,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큰 삶의 운동력이 되기도 하고 새로운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계시만 가지고서는 부족한 옆에 있는 누군가가 사람이 격려해지고 위로해주는 것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입니다.
대림절기도 다 지나가고 이제 자주색 영대를 하는 날도 이제 다 끝나고, 대림초 네 개도 다 이렇게 켜지니까, 아 정말 한 해가 저무는 감회가 새롭습니다. 요즘 집에 있는 사진첩들을 다 청소하면서 봤더니 옛날에 찍어놓은 사진들이 있어요. 근데 20년 전 사진을 보니까 ‘아 이런 때도 있었네’ 하는 생각이 들고, ‘아 그 이때도 살아 있었구나’, 그래서 굉장히 낯설게 옛날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요즘에 ‘안리타’라고 하는 분의 시집을 지금 두 권째 읽고 있는데 거기에 ‘살아진다 사라진다’라고 하는 시집입니다. 올해를 마감하는 저의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이 시인이 살다 보니까 사는 맛이 없을 때도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살고 싶지 않다’ 그래도, 살아지는 거예요. 그리고 ‘살고 싶다’ 그런 때도 똑같이 살아지는 거죠. 그런데 또 한편, ‘떠나가지 말라고 해도 떠나가고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그 계절 속에서 내가 이렇게 나의 하루하루가 사라지고’, 그렇게 저의 올해 한 해가 사라지는 것처럼, 시인의 인생도 그렇게 사라져가고 있죠. 그래서 우리가 원하든 안 하든 우리가 살아가고 있고 사라지고 있는 이 순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네요. 마지막 구절만, 세 문장이니까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네, 살고 싶지 않아도 살아지고 살고 싶은 날에도 살고 있는 이런 알 수 없는 생의 한가운데를 올해 서성입니다. 단지 우리 잘 살아지기로 해요. 그리고 우리 잘 사라지기로 해요.
제가 희년교회에 온 지 조금 시간이 지나서, 이제 서로 조금 편해질만큼 시간이 흘렀네요. 이곳에 와서 저희가 나눈 것은 굉장히 적지요. 주일날 1시간, 2시간 나눈 거지만 그것이 서로들에게 힘이 될 때도 있고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라지고 있는’ 소중한 시간, 우리가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살아지고 있는 이 시간에, 조그만한 그런 격려와 힘이 서로에게 될 수 있는 그런 공동체로 2025년을 맞을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성모가 엘리자벳을 만난 그 기쁨으로, 우리 서로에게 격려가 되는 이 기도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번에는 감리교 선교신학자 필립 미도우즈Philip R. Meadows의 ‘디지털 문화 속에서의 선교와 훈련’Mission and Discipleship in a Digital Culture에 대하여 소개하려 합니다. 미도우즈는 ‘전도와 제자삼기’, ‘선교적 교회론과 교회개척’, ‘오늘의 문화 속에서 선교하기’, ‘웨슬리 신학과 영성’의 전문가이며, 디지털 문화 속에서의 선교 참여와 서구의 세속화 문제 등에 대한 많은 학술 논문을 발표했는데 최근의 발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웨슬리 DNA의 훈련: 21세기 교회를 위한 훈련의 새로운 표현들 The Wesleyan DNA of Discipleship : Fresh Expressions of Discipleship for the 21st Century Church (Grove, 2013)
세례를 기억하라: 웨슬리 영성의 훈련과 선교 Remembering Our Baptism : Discipleship and Mission in the Wesleyan Spirit (Discipleship Resources, 2017)
이 논문에서 미도우즈가 분류한 디지털 문화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세 가지 경향성은 현대 코비드19로 인한 언텍트 사회와 목회에 적용할만한 틀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디지털 변혁의 파장을 ‘수렴의 관점’perspective of convergence에서 선교와 훈련의 방향으로 재정립할 것을 이 논문에서 그는 제안합니다.
수렴의 관점
저자는 새로 부상하는 디지털 문화가 낡은 미디어(또는 디지털 이전의 방식)을 완전히 대치하게 될 것이라는 ‘디지털 혁명’의 관점에 그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 것과 낡은 것, 디지털 미디어와 전통적 미디어가 전례 없는 복합적인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수렴(융합)할 것이라는 젠킨스Jenkins의 의견에 그는 동의합니다. (수렴의 문화: 새 미디어와 낡은 미디어가 부딛치는 곳Convergence Culture: Where Old and New Media Collide)
그래프를 보면 x축 위에서 접근하는 선과 아래에서 접근하는 선이 점점 0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도우즈에 의하면 ‘수렴의 원리’principle of convergence란 ‘인간의 삶(관계들와 공동체)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다양한 전통들과 관행들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미디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방식과 디지털 방식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일상생활)로 점점 가까워져 융합된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이 일상생활이란,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 일터에서의 협업, 여가시간의 사용, 쇼핑, 세금 납부, 정책 결정 참여 등과 같은 방대한 영역, 방식의 개편이 이루어지는 모든 분야들을 의미합니다. 이 논문의 목적은 1)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디지털 문화’가 새로운 시대의 약속인지 함정에 불과한지를 살펴 보고, 2) 선교와 훈련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한 광범한 (디지털 문화의) 의미들(암시들)을 탐구해 보는 데에 두고 있습니다.
데이빗 벨의 디지털 문화론
저자는 데이빗 벨David Bell의 ‘사이버문화 개론’An Introduction to Cybercultures에서 소개한 물리적, 상징적, 체험적 설명을 소개하여 ‘디지털 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을 잡습니다.
1 물리적 접근
디지털 문화에 대한 물리적 설명은 컴퓨터와 디지털 장비와 인터넷의 기원과 발전과 활용으로 오늘의 일상 생활은 점점 더 디지털 미디어의 ‘가상 영역’virtual realm에 잠겨들고 있다고 합니다. 이 접근방식들은 주로 도구들, 양식들, 기능들에 집중하며, 모든 곳을 둘러싸고 있는 ‘유비쿼터스 컴퓨팅’ubiquitous computing 환경, 가정과 일터와 노동과 여가의 상호연결interconnecting의 패턴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디지털 네트웍들이 현대사회의 주요한 조직 모드가 되고 있다. (판 디에크Van Dijk의 ‘네트웍 사회: 새 미디어의 사회적 측면들’Network Society: Social Aspects of New Media).
소셜 미디어가 전통적인 사회관계들을 대체하는 현상.
아바타avatar가 가상 공간에서 취직도 하고, 땅도 사고, 집도 짓고, 교회도 가고, 결혼도 하고, 정착도 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관한 (팀 게스트Tim Guest의 ‘제2의 인생: 가상 세계로의 여행'(Second Lives: A Journey Through Virtual Worlds).
수렴의 관점에서 보면 ‘디지털 공간에 거주’ 는 가상 네트워크가 대화식으로 일상 생활의 흐름에 접해 있는 생활에 몰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포스트 데스크탑’ 세계에서 가상공간cyberspace는 ‘저 밖에 있는’ 비현실적인 영역이라기 보다는, 광범한 정보 교환과 사회 관계들을 위하여 디지털 장비들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일상 생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2 상징적 접근
디지털 문화에 대한 상징적 설명은 소설과 예술과 영화를 통하여, 우리와 기술의 관계를 상상하고, 미래에 대한 우리의 희망과 두려움에 관한 설명을 하는데 그 유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트루먼 쇼우Truman Show와 매트릭스Matrix에 나오는 것처럼, 기술과 사회가 융합되어, 배후의 사회정치적 세력들이 디지털 미디어를 사용하여 현체제status quo를 유지하도록 우리를 길들인다는 이야기들.
우주 여행Star Trek과 이백년의 사람Bicentennial Man에 나오는 것 같이, 기술과 몸이 융합되어, 디지털 임플란트와 로봇 보철, 핸드헬드 컴퓨터와 블루투스 이어폰, 유전공학, 노노 기술, 로봇 공학의 개발을 통해 인간 유기체에 가까워진 기술, 기계와 인간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
트론Tron과 잔디깎는 사람Lawnmower Man에 나오는 것 같이, 기술과 생각이 융합되어, 우리의 의식을 업로드하거나 디지털 기술로 낚아채어, 우리 생각(마음)의 소프트웨어를 우리 육체의 ‘웻웨어'(wetware, 기계를 뜻하는 하드웨어에 비하여 우리 몸을 가리킴)로부터 분리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들.
이런 상징적 질문들을 통하여 디지털화된 포스트 모던 사람들은, 기술적 숙달과 조작의 환상을 넘어서는 진짜 자아, 진짜 관계, 진짜 공동체 같은 것이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3 체험적 접근
디지털문화에 대한 체험적 설명은 ‘원격 대면’telepresent로 요약할 수 있는데, 시간과 공간으로 떨어져 있는 어딘가에 또는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느낌을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얼굴을 대면하는 만남의 가치를 이러한 ‘원격 대면’의 체험이 재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합니다. 아무리 원격 대면의 기술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맛 보고, 냄새 맡고, 만지는 구체적인embodied 친구와의 대면을 대치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매체가 다른 사람들과 더 연결되어 ‘항상 켜져 있는’always on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부재(외로움absence)의 감정을 극복하게 해 주고, 시공의 한계들을 넘어 풍부한 체험들을 나눌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나 이 또한 혼자 있기를 갈망하는 사람들과, 텍스트, 트윗, 현재상태 업데이트등의 스트리밍 문화에 떨어지지 않고 주의글 기울이려는 사람들 사이의 체험의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항상 켜져 있음’의 중독과, 얼굴을 대면하는 심도 있는 만남의 대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게 됩니다.
위의 세 가지 이야기들에 대한 미도우즈의 요약은 이와 같습니다.
요약하면, 디지털 문화는 일상 생활에 가상적 차원을 추가합니다.
한 편으로 디지털 기술은 우리의 구체적(현실의) 관계들을 여러 측면에서 향상시키고 확장시켜 주지만, 우리의 삶을 여러 다른 영역들로 분리시켜 구획화compartmentalize 시켜 버리거나, 가상의 생활 그 자체를 목적(주객전도)으로 삼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 디지털 매체의 분리하는disembodying(구체적 형태로부터 자유롭게하는) 효과는 우리의 가상적인 삶에 엄청난 자유와 유연성을 가져다 주지만, 설득력 있는 ‘시뮬레이션’ 뒤에 중대한 손실들을 은닉하고, 온전한 인간 관계들에 덜 정착하도록 유혹할 수 있습니다.
이 ‘구획화’와 ‘분리’의 긴장들은, 성육신하신 구세주의 모본을, 온 삶으로, 선교하는 제자mission-shaped disciples로서 따르려는 이들에게 심각한 도전을 제기합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려는 이들에 대한 위와 같은 디지털 문화의 도전에 대응하는 방식을 분류하는 데에 미도우즈는 프랜스키(Marc Prensky, 디지털 원주민과 디지털 이주민Digital Natives, Digital Natives)의 디지털 원주민과 디지털 이주민에 대한 문화적 연구에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구도 ‘타고나면서부터 디지털’born digital일 수 없고, 태어나면서부터 토착화된inculturated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선교학적으로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에 대한 입장을, 디지털 외계인digital alien, 디지털 선구자digital pioneer,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미도우즈에게 독특한 것은 이 세 가지 경향성이 각각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한 사람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는 상호 모순되면서도 상존하는 양가 감정 또는 태도로 본다는 것입니다.
1 디지털 외계인
이들은 무비판적인 기술의 도입에 대해, 성서적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깎아내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저항합니다. ‘기술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주요한 이야기들은 성서에 관한 것이어야 하며, 우리는 매우 ‘전통적인’, 디지털 이전pre-digital 뿐 아니라 근대 이전pre-modern한 생활 양식에 자리잡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관계하시는 매개체로서, 주변 백성들로부터 구별하여 부른 거룩한 백성의 형성을 통해서, ‘몸으로’in the flesh 하느님 현존의 실재reality와 아름다움을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이들에게 성서적 교회란 함께 직접 빵을 떼고 서로 발을 씻겨 주는, 더불어 사는 것을 체현하는 성육신은, 가상의 형태로 온전히 표현될 수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여기서 미도우즈는 역설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물리적으로 모인다는 것이 그렇다면 서로가 진정 현존really present(서로를 진정으로 느끼는)을 보증하느냐는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같은 곳에 머문다고 해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얼굴과 얼굴을 직접 대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삶을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의 영적 뿌리는 실제 영역이나 가상 영역 모두에 뻗어 있어, 하느님의 선교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을 약화시킵니다.
2 디지털 파이어니어
이들은 전도와 훈련과 공동체를 탐험(실험)할 수 있는 디지털 공간의 잠재력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스도인 삶의 ‘전통적’ 표현들은 디지털 기술들과 상호작용에 매개될 수 있다고 봅니다. 성서적 그리스도교가 현실과 가상의 양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봅니다. 디지털 외계인이 디지털 미디어의 힘이 우리의 제자도를 잘못구성mis-shape한다고 저항한다면, 디지털 파이어니어들은 디지털 미디어의 힘을 장악하여 우리의 사역을 재구성re-shaping하는 데에 사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가상 교회의 다양한 실험들을 소개합니다.
여기서도 저자는 디지털 외계인의 입장에서 파이어니어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아바타가 된다는 것은 성육신한다는 것과 같지 않으며, 복음은 전송하기 편한 비트와 바이트의 정보로 디지털화 할 수 없다는 점, 가상의 복음은 편하고 안전하고 즉각 접할 수 있는 상품commodity으로 왜곡되어, 포스트모던 개인주의의 갈망들을 살찌우며, 영성을 내적 종교 체험의 추구로 축소시키고, 사목을 개인의 영적 여정을 위한 가상의 사역chaplaincy로 바꾸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놀라운 점은 이런 가상 교회에 대한 비판은 전통적 교회에 거울처럼 반사시켜, 제자도 전반in general(전통적 교회를 포함하여) 소비주의와 개인주의는 오래 앓아 온 역병과 같은 문제였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가상의 교회가 실재 교회와 반목하는 것이 아니고, 가상의 교회가 전통적 교회를 대체하는 것도 아니고, 서로 보완하면서 그리스도교 제자도와 공동체의 표현들을 함께 풍성하게 해 줍니다.
3 디지털 원주민
디지털 외계인이 실재embodied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디지털 파이어니어가 가상virtual 공동체의 잠재력을 강조한다면, 디지털 원주민은 양자(실재와 가상)를 통해 표현되는 영적 우정의 네트웍에 소속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 합니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몇 권의 참고 도서를 권해 주고 있습니다.
아담 토머스Adam Thomas, 디지털 제자: 가상 세계 속의 진짜 그리스도교Digital Disciple: Real Christianinty in a Virtual World.
엘리자벳 드레셔Elizabeth Drescher,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트윗하세요: 디지털 변혁 가운데 교회를 실천하기Tweet if You Love Jesus: Practicing Church in the Digital Reformation.
제시 라이스Jesse Rice, 페북 교회: 초연결성이 어떻게 공동체를 재구성하고 있나How the Hyperconnected are Redefining Community.
렉스 밀러Rex Miller, 새천년 매트릭스: 교회의 과거를 되찾고 미래를 다시 구성하기The Milenium Matrix: Reclaiming the Past, Reframing the Future of the Church.
이들은 가상 교회들이 전통적 표현들을 단지 흉내내기만(시뮬레이션simulate) 한다면 그런 곳에 참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들이 관심있는 것은 진정성authenticity입니다. 디지털 원주민들은, 집에서든, 특별히 마련된 성소에서든, 스타벅스와 같은 만남의 장소든, 페북과 같은 가상의 네트웍이든, 그리스도인들이 친교(상통)을 위하여 모일 때마다 어떻게 교회가 형성되어갔는지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연결적인(하는) 공간들’connective spaces로서, 함께 흐를 수 있고, 진짜real 사람들이 하느님과 그리고 서로와 변혁적인transforming 관계들을 형성하고 지속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디지털 외계인들이 매체에 저항하고, 디지털 파이어니어들이 메체를 재형성한다면, 디지털 원주민의 기본 입장은 매체를 ‘리믹스’remix, 다시 섞어 재창조한다는 것입니다. 이 리믹스된 관계들에는 실재와 가상의 삶 사이의 구분이 필요가 없습니다. 육신flesh이 가상적 관계들을 통해 원격 대면telepresence이 되는가 하면, 원격 대면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모임들을 통하여 육신이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택하신 매체가 디지털 문화를 위하여 리믹스된다면, 디지털 외계인들은 진짜 상실들이 확신을 주는 시뮬레이션 뒤에 감춰어지고, 일상 생활이 가상 이미지 속으로 재형성되고 말 위험에 대해 지적합니다. 이것이 실재 현실이 방치되는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실재 사람들이 육신 안에서 초실재hyper-reality의 습관을 을번시킴에 따라, 깊이와 진정성의 상실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디지털 문화의 위험은 우리가 덜 인격적으로personal 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 가운데 항구적으로 ‘몸을 벗어난 체험’을 하며 살아가는 초인격hyperpersonal이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즉 (직접 접하는) 이웃들을 위한 얼굴과 ‘항상 켜져 있는’always on(가상의) 관계를 위한 이중적인 얼굴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성으로 서핑을 하면서, 계속 부분적으로만 주의를 기울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온전히 대면하지 않을 위혐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덜 관계를 맺는 위험이 아니라, 초친밀함hyperintimate, 즉 계속 (때로는 분별 없이) 공중이 소비할 개인적인 메시지들을 과하게 나눈다는oversharing 것입니다.
디지털 문화에 참여하기
저자 미도우즈는 디지털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사는 것에 관하여 영성, 훈련(제자화), 친교(상통), 전도의 영역에서 분석을 계속합니다. 그의 수렴적 관점에서 보면, 삶의 가상적 차원은, 온전히 현실화된(실재의) 제자도를 대체하기보다는, 증대시키고 확장합니다. 하지만 가상적 생활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으려는 열망은, 소위 ‘진짜 교회’ 안에 내재하는 영적 질병의 증상으로 보입니다. 공허한 예배, 창백한 친교, 엷은 실천들, 진정한 생활의 것들과 단절된 모든 것들은, 영양부족인 영혼들과 영적 의기소침함을 초래합니다.
저자는 디지털 문화 속에서 전개하는 선교의 미래는, 온라인 세계 속에 가상 교회를 개척하는 데에도, 전통적인 교회를 기술적으로 더 향상시키는 데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지역 교회가 ‘훈련을 하지 않는다면’not making disciples, 기술을 포용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정한 제자도의 추구’가 없다면, 가상 영역에 진짜 증언도, 가상 영역의 유익을 분별하는 것도, 위험을 감수하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저자는 영성과 훈련과 친교와 전도의 영역에서 이제 구체적인 분석을 시작하지만, 저의 요약은 여기에서 멈추려 합니다. 리뷰의 글로 시작했는데 자꾸 욕심이 나서 세세한 요약을 계속 하게 되었습니다. 독자가 이 논문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 리뷰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더 자세한 것은 잠시 여러분들께 맡겨 드리고 싶습니다. 이 논문에는 요약이 담지 못한 생생한 개념정의, 분석, 묘사들과 무엇보다도 풍부한 자료 소개가 있습니다.
코비드19로 인하여 디지털 외계인과 파이어니어의 토론과 논쟁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이 때에, 미도우즈의 분석과 분류는 전반을 볼 수 있는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점점 떠오르고 있는 디지털 원주민과 이 문화에 더 익숙해지는 사람들과 경험들이 어떤 특징과 약점을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도 도움이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대면 예배를 계속하겠다’는 극단적인 표현과 또 그 반대의 입장들에 대하여 진영이 나뉘는 것 같은 한국의 현실에서, 외계인과 파이어니어와 원주민의 경향이 모두의 마음 가운데 동시에 존재한다는 그의 통찰은, 우리가 어떤 입장을 악마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함께 접근해 가야 한다는 섬세함을 가다듬게 해 줍니다. 물론 이런 논쟁의 가치와 아픈 과정의 필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되겠지만,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양심을 한 번 더 기다려 보게 해 줍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디지털 문화의 쟁점을 외부가 아닌, 진정한 훈련,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제자화에 두고 있는 점입니다. 상황이 어떻게 변하던 이를 더 진정한 교회로 거듭나는 기회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디지털 문화의 격변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참여하려면 어떤 영성, 훈련, 친교, 전도를 하여야 할지 더 깊게 생각하고, 저자의 글을 통하여 함께 더 깊어지기를 바라며 이 소개의 글을 마치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