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인내와 희망의 혼합물]

2025. 2. 2. 주의 봉헌 축일


오늘 복음서에서 묵상한 ‘성 시므온 성가’는 30년 전 신학교 채플에서 매일 까만 옷을 입고 동료들과 저녁 때마다 드리던 기도의 시간을 떠오르게 합니다. 우리는 매일 저녁마다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주의 종을 평안히 돌아가게 하시는도다.
주께서 만민 앞에 세우신 구세자를
내 눈으로 친히 뵈었나이다.
이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시요
이스라엘의 영광이로소이다.


매일 저녁 시므온 송가를 부르는 이 전통은 수도자들의 저녁 기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 시간에, 하루의 일상생활에서 만난 주님을 감사하며, 휴식을 준비하는 고요한 이 노래는 우리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 줍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인생을 마감하는 엄중한 시간에도, 그동안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이런 평안한 노래를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영광스러운 축가를 부른 시므온은, 근심어린 어조로 ‘가슴을 찌르는 고통’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감탄과 염려가 공존하는 순간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삶은 축복과 고난, 생명과 죽음이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 뿐 아니라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오래 전에 15일 피정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조용히 있다 보니, 더욱 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게 되고, 그러고 보니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인생의 회한과 아쉬움이 떠올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의 인생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인생이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 그런 눈으로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또한 가까운 분들의 인생 속에도, 기쁨과 영광의 순간과 함께, 회한과 억울함과 고생의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고생을 많이 하며 살았던 아버지, 어머니의 기억을 되살리다가, 그 나이를 보니 30대 밖에 안 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감사한 세월이었지만 또한 세상의 물결 속에서 고생한 세월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곳에 함께 하신 여러분의 인생은 어떠했나요? 어떠한 기분으로 보았는가에 따라서 아쉬움과 감사가 교차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을, 오늘의 본문을 묵상하며 하게 됩니다.

신앙의 눈은 이러한 흙과 같은 인생의 진실과 연약함을 직시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걱정과 연약함을 주님께 고백하고, 시므온과 안나처럼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은 인내와 희망의 혼합물입니다. 인내는 고통을 참는 것입니다. 영어에서 환자라는 단어가 ‘인내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라고 한 내용은, 원래 ‘이스라엘의 위안’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고난과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추운 겨울에 오지 않는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떨고 서 있었는데, 결국 멀리서 오고 있는 버스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인내와 희망은 상황을 극복하는 힘이 됩니다. 그렇게 기다림으로 주님의 구원, 주님의 위안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허약한 자기 연민과 회한을 넘어서야 합니다. 신앙인은, 후회하고 절망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사하고, 극복하고, 초월하고, 싸우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고비길에 지금 어떤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까? 지금 어려움이 있더라도, 심지어, 죽음의 엄중한 고난이 앞을 가려도, 우리는 시므온과 안나처럼, 희망을 품고 기다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기다림의 끝에 ‘이제 이 종을 평화 가운데 나아가게 하시나이다’라고 하는 겸손와 감사의 신앙생활에 더욱 깊이 이르기를 바랍니다.

[선포는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2025. 1. 26. 연중3주일


열심히 하려고 하면 더 안 되는 게 많이 있습니다. 노래 부를 때도 제가 열심히 하려고 목에다 힘을 주면 목소리도 잘 안 나고요. 자연스러운 울림도 안 나고 또 글씨도 제가 꽉꽉 눌러서 쓰는데 꽉꽉 눌러서 쓰다 보면 글씨가 참 더 엉터리가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슥슥 문질러지게 쓰면 훨씬 더 잘 써지는 것 같습니다. 악기도 그렇게 약간 뿌연 소리를 내려고 하면 오히려 명쾌한 소리를 내려고 할 때보다 더 풍성한 소리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설교도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준비가 너무 안 돼 있어도 문제지만 너무 과해도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설교로, 딱 한 줄 설교를 하셨는데, 정말 그렇게 장황하지 않은 설교를 준비하려고 해도 자꾸 욕심이 생기고 자꾸 태도가 경직되는 것을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복음 선포가 무엇입니까? 고대 사회에서는 주로 새로운 왕조가 형성됐을 때 그 왕조의 수립의 정당성을 얘기하거나 앞으로 이런 식으로 정책이 바뀔 거라든가 이런 것들을 담고 있는 게 선포였죠.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3.1독립선언이 하나의 선포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일본천왕이 항복선언하는 거 라디오에 나오는 거 나오잖아요. 또 예를 들면 대한민국 초기의 토지개혁 법령도 그런 예이지요. 동북아시아가 굉장히 근대화가 빨리 이루어졌는데 그 초석이 되는 토지개혁령이 발표되는 순간, 토지소유에 대한 원칙이 확 바뀌어가지고 경자유전으로 돼서 엄청난 큰 변화가 일어나죠. 이런 것들이 바로 선포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또 저희가 있었던 건 우리가 잠을 못 자면서 봤던 계엄무효선언 이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선포의 내용들인 것 같아요.

그래서 선포라는 것은, 적어도 저희가 주일날 교회마다 가서 10분 20분 또 길게는 40분 50분 들어야 하는 그런 지루하고 졸리는 종교적인 설교가 그런 선포는 아니었던 것 같고, 더 역동적이고 뭔가 좀 파괴력이 있는 그런 것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선포는 굉장히 간단합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냐면 오늘 이 성서의 말씀이 너희들 가운데 이루어졌다 라고 얘기하는데. 그건 뭐냐면, 갇혔던 사람들이 자유롭게 되고 억눌린 자가 자유로웠고 배고픈 사람들이 배부르게 되고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날이 돌아온다라고 하는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얘기인데 사실은 이게 예수님의 회당에서 자리에 앉으셔서 얘기하신 이 내용은 마치 새로운 왕조를 형성한 왕이 이런 원칙으로 내가 다스리겠다라고 하는 하나의 왕위 즉위, 왕조 수립의 선언을 하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법적인 강제력이 생긴 다음에 법에 대한 선포를 하는데 예수님의 방법과, 성경에 나온 방법들은 그 반대 방향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먼저 그 법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먼저 생겨나고 변화는 그것에 뒤따라오는 식으로, 그렇게 모든 것들이 바뀌어 나갑니다. 마치 홍해가 갈라진 다음에 건너가야 되는데, 홍해가 갈라지기도 전에 몇몇 사람들이 그쪽으로 전진해 들어갔을 때 나중에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것이죠.

굉장히 무모해 보이고 약해 보이지만, 그것으로 서양사가 전체가 바뀌고 인류에서 굉장히 소중한 유산들이 기독교를 통해서 나온 걸 보면 이 방법이 굉장히 획기적인 방법인 것 같습니다.


요즘에, 그에 비해서, 언론에는 기독교가 그렇게 안 좋게 비춰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동안 기독교가 이 세계에서 한 공헌이 많은데, 요즘 들어보면 너무 창피한 얘기가 많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히틀러 같다고 그러고 어떤 사람은 모택동의 행동대 홍위병 같다고 그러고. 오늘의 한국의 법률과 경제와 윤리와 정치와 문화는 굉장히 세련되고 고급스럽습니다. 고도화된 질서와 의사소통 방식으로 사회가 운영되고 있는데, 거기에 굉장히 야만적인 사람들, 폭력 만능주의, 반지성주의를 가져온 사람들에 대한 명단에, 기독교의 목사, 기독교 전도사들이 따라 붙는 것 같아요.

옛날에 제가 처음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복사기들이 좀 후져가지고 복사가 안 되면 주먹으로 팡팡 때려가지고 복사를 하고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는데 요즘에 몇 천만 원, 몇 억 원 하는 고급 장비와 컴퓨터 시스템이 잘 안 돌아 간다고 해서 주먹으로 막 치는 사람이 있으면 아마 해고가 될지도 모르겠죠. 그러한 폭력지상주의 이런 것들하고 기독교가 이렇게 연결되는 것은 왜인가라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한다고 하면 알맹이 딱 빼고,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명령한다고 하는 그 껍데기만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얘기하신 어조는 주로 친구와 같은 톤으로 얘기를 하셨지 로마 집정관이나 장군의 포고문과 같이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거 몇 번 안 되죠? 오늘 본문에서 나온 선포를 하셨고, 하느님 나라의 원리로 팔복을 선언하셨고, 그 나머지는 다 친구로서 이야기를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셨던 것을 우리가 압니다.


이대용 주교님이 옛날에 설교는 공동체의 대표 간증이다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간증이 뭡니까? 그냥 일반인으로서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을 나누는 거죠. 그래서 굉장히 그 말이 요즘에, 굉장히 다가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이 사회에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오히려 그 저변을 감싸는 우리의 대부분의 말은 따뜻함과 사랑과 공감과 그런 동등함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너무 일방적인 문화에 익숙해져 있어서 듣는 사람이 잘 생각할 수 있는데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다 구원을 못 받고 무식한 사람들이라 우리가 가르쳐줘야 돼 라고 하는 그런 오만한 태도를 우리들의 마음속에 내면화시켰기 때문에, 요즘에 우리 기독교가 제일 어떤 의미에서는 이 사회의 사고지구로 되지 않았나 하는 그런 반성을 해보았습니다. 듣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예수님의 소통 방식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았나 스스로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과 느낌을 존중하였던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의 법으로 우리의 공동체를 새로 만들어가고 우리들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우리들의 문화를 바꿔 나가야겠습니다. ‘이 사랑과 포용의 선물이 여러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예수님의 자비하신 선포를 내면화합시다. 이 선언이 우리들 가운데 변화를 가져와서, 한 사람 한 사람들의 생활에 새로움을 가져올 것을 믿습니다.

[사소한 일상 속에 만나는 하느님]

2025. 1. 19. 연중2주일


제가 신학교 1학년 들어갔을 당시 신학과에는 항상 1학년들이 논쟁이 있어요. 술을 마셔도 되는지 안 마셔도 되는지.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보수교단에서 왔기 때문에 술 마시는 거 굉장히 좀 싫어했는데 어떤 선배들은 술을 마시면 어떠냐고 도전을 하곤 하였죠.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 아무튼 술을 만든 기적이라고 하는 걸 보면, 예수님이, 어떤지는 몰라도 술을 안 마시는 분은 아니신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누가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 빵과 포도주는 우리나라에서 밥과 국하고 비슷하다. 그래서 그냥 제일 간단한 거 먹는 기분이 그런 거다 이렇게 얘기는 하더라고요.

이 구절을 보면서 항상 생각나는 것은, 비틀즈의 ‘렛잇비’가 생각이 나는데요.


렛잇비: 그냥 그렇도록 두어라,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무엇이든지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여라’ 이렇게 번역이 됐네요. 작가는 당시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 굉장히 죄책감도 느끼고, 막 그 절망에 빠졌는데, 하루는 그 어머니가 마리아의 모습으로 꿈에서 나타나서 그런 얘기를 했죠.

네가 할 수 없는 것들 가지고 고민하고 슬퍼하고 그러지 말고, 하느님께서 이 세계를 움직여 가시는 것을 봐. 그냥 놓고 봐. 네가 다 하려고 그러지 말고 이렇게 지혜로운 언어를 가르쳐줬다고 한 그 가사가 이 구절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얘기를 듣고 제가 굉장히 깜짝 놀란 적이 있었어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들이 굉장히 많지만, 사실은 이 세상이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도 많고 또 때로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들이 많고, 그런 것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선물로 다가오는 것을 우리가 보기는 보곤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그런 강박관념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교회가 오늘 교회의원회 저희가 했어요. 그래서 우리 교회의원님들이 작은 교회의 살림이지만 밖에 있는 뭔가 돕는 일을 선교를 열심히 하자. 그래서 선교에 대한 의논이 굉장히 많이 됐었거든요. 그래서 아무튼 그 교회도 외부에 선교를 많이 했는데 하면 할 수 없이 진이 빠지는 거예요. 해도 해도. 계속해서 할 일이 생기고 계속해서 다급한 일이 생기고. 그래서 그 어느 한 해는 거기에 그 신부님이 “우리 그러면 다 이거 중단하자. 중단해도 하느님께서 그 도와야 할 가난한 나라, 거기서 활동하고 계셔. 우리가 돈을 내야지만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게 아니야.” 이렇게 해서 한번 끊고 생각을 해봤더니 나중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그랬더니 나중에는 할 수 있는 만큼을 하다 보니까 전보다 더 많이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외부에 대한 활동을 할 때 기억하여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미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과 우리는 감사하면서 그것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시중 드는 정도로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좋다고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논의가 앞으로 하면서 많이 됐으면 좋겠지만 우리가 세상에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동력자로 참석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잘 시작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런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인간 생활을 하다 보면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아요. 우리는 또 상당히 기독교는 합리적인 사고를 중시하던 근대의 영향이 많아서인지, 무엇이든 매뉴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밥을 말아먹으면 밥을 이만큼 말아먹는 게 좋을까 그렇게, 매 순간순간에 이게 뭔가 매뉴얼에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교회 운영에서 만나는 사안들에 대해서도 분명히 어떤 규정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외부적인 어떤 척도를 계속해서 고민하는 적이 많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그러한 척도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이 느끼는 아주 미묘한 예와 아니오 사이에 있는 미묘한 그러한 느낌의 차이가 굉장히 중요한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는 명확하고, 예냐 아니오냐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순간에 우리들의 내면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재능에 의해서 느끼는 그런 미묘한 마음에 있는 것도 우리가 알게 됩니다. 현대까지는 복잡하거나 단순하거나 어떤 답이 정해진 경우가 많은 시대에서 살아왔지만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전혀 전에도 보지 못하고 복잡한 것들이 많이 있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들에게 맞는 진리에 대한 관점은 어떤 명시적인 어떤 말로 이루어진 그것들에 앞서서, 나 스스로가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에 더 초점을 맞추는 그런 신앙으로 우리들의 윤리와 도덕과 신앙의 교리가 변해갈 시대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 여기에서 나누는 짧은 짧은 서로의 대화와 일상에서 나누는 느끼는 하나하나의 교환 속에서, 더욱더 수준이 높아지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진리가 그러한 주님께서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활동하시는 그 속에서. 더욱더 우리들에게 잘 나타날 수 있는 그러한 깨어있는 우리들의 한 순간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어떤 재판관 같은 명료한 사고에서 한층 더 나아가, 예술가 같은 감성으로 승화된 진리 추구입니다. 서로 일상생활에서 겪는 미묘한 느낌들을 신뢰하고 나눌 수 있는, 그런 공동체로서, 우리들의 한 해를 잘 개척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용암처럼 분출하는 예수 스피릿]

2025. 1. 12. 주님의 세례 축일


예수님에 대한 복음 메시지에서는 시편의 노래와 춤이 배경음악처럼 흐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신 말씀은 시편 22편의 울림을 저희에게 전해 줍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들러온 ‘너는 내 아들이다’라는 말씀은 이사야 43장의 울림을 불러 일으킵니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성서 시대에 가까웠던 예수님 당시의 독자들은 마치 우리가 트로트나 K 팝 가사들을 알듯이 이 곡조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1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건져주지 않았느냐?
.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람이다.
2 네가 물결을 헤치고 건너갈 때 내가 너를 보살피리니
. 그 강물이 너를 휩쓸어가지 못하리라.
3 나 야훼가 너의 하느님이다.
.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내가 너를 구원하는 자다.
. 이집트를 주고 너를 되찾았고
. 에티오피아와 스바를 주고 너를 찾아왔다.


우리도 그런 떠올릴 노래가 있습니다.
저는 ‘힘들고 지쳐’로 시작하는 찬양곡을 알고 있습니다.


당시 공화정은 세습을 방지하기 위하여 로마 집정관 또는 대통령 후계자를 다른 집안에서 데려오는 관례를 유지했는데, 그 후계자 지명식에서, 이 사람은 나의 아들이다, 나의 딸이다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런 존귀와 권능을 지니셨다면, 우리도 그와 같은 존귀와 힘을 갖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 곡은 소리쳐 외치는 ‘락’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락 스피릿’에 대하여 ‘자신을 지탱해 온 힘’이자 ‘자신의 피를 끓게 만드는, 용암처럼 뜨거운 무언가’라고 했습니다(인용: “락스피릿이란 무엇인가” ohdeok). “클래식에도, 발라드에도, 재즈에도, 고3 수험생에도, 월급쟁이에도, 실망한 사람에게도 있는,” 이 도전의 힘이, 예수님 세례를 형상화한 이 곡 속에도 느껴집니다.

이러한, 죽음의 물에서 나와 의연히 서 계신 예수님과 같은, 변화의 힘, 분출하는 끈기와 생명력이 여러분의 한 해에 충만하기를 빕니다.

[성탄으로 인간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느님]

2025. 1. 5. 성탄 2주일


올해 새해 첫 예배인데 이 새 예배를 요한복음 1장으로 시작하니까 너무 감회가 새로운 것 같아요.
전에 요한복음 1장이 화려하게 적힌 액자가 있어서 알아 보았더니, 오래 전 라틴 전례에서는 미사가 끝날 때마다 사제가 제대 위에서 요한복음 1장을 읽었다고 합니다. 성육신의 신비를 신자들과 함께 묵상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요한복음 1장의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정말 기쁜 소식과 신앙의 진리를 정말 깊게 담고 있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하느님의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직접 오셔서 정말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맡겨주셨습니다. 성육신의 신비 또는 강생의 신비가 얼마나 우리들에게 큰 기쁨인가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것 같아요.


  1. 누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개신교는 공생애의 종교다 이렇게 얘기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같이 제자들과 사람들과 함께 시련도 당하시고 어려움도 겪으시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시는 거기에 굉장히 초점을 나누고 있다고 한다면.
  2. 정교회는 부활의 포커스가 있다 이런 얘기를 해요. 그래서 부활에서 정교회는 굉장히 부활심장이에요. 부활심장이 중요하고 승리하신 그리스의 영광에 굉장히 초점이 맞춰져 있죠. 그래서 러시아 대문호 중에 부활이라는 글을 쓰신 분도 있고 그런 게 굉장히 우연이 아니다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3. 그리고 가톨릭에는 뭐가 포커스냐 그러면 굉장히 고난에 초점을 맞춰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 그리고 거기서 온 세상의 인류를 위해서 고통을 받으신 주님 앞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이렇게 들었어요.
  4. 그에 비해서 성공에는 어디에 초점이 있냐 라고 하면 어디에 있는 것 같아요. 이 성공에는 대단히 성육신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이렇게 오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 우리 성공회에서는 이 성탄절기와 이 공연절기가 또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예수님의 입장에서 하느님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이곳에 내려오신 성육신이지만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것은 성화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정말 이 미천하고 정말 하느님도 알 수가 없고 정말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하느님께 오심으로써, 저희들이 거룩하게 되는 그런 역사를 정말 우리 입장에서는 얘기할 수 있는 것 같아요.

  1. 기도를 많이 하신 분들이 그 얘기하시는 거는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과정을 몇 단계로 얘기하죠. 그래서 처음에는 깨끗하게 하신다고 그러죠.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옛날에 나쁜 짓 한 거 나쁜 생각 한 거 이런 걸로 어지러워 걱정 근심 이런 걸로 어지러워져 있는 우리들의 생각을 하느님께서 하나하나 이렇게 만지셔서 좀 가라앉게 해주시면.
  2. 그 다음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비춰주신다고 그래요. 그래서 우리들 마음을 이렇게 착 비춰주시면 이것이 무엇이 진리였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고 이런 걸 알게되지요.
  3. 알게 되면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거룩하게 만드셔서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는 거룩한 사람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신다고 해서 이 성화를 마지막 단계로 하죠.

근데 그것이 어떤 단계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고 해요. 그래서 거꾸로 되는 경우도 있고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만 그냥 우리가 인식의 순서로는 정화시키시고 우리들을 밝은 빛으로 비춰주시고 우리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으로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들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들의 성화, 우리들의 미천하는 우리들을 당신의 뜻으로 거룩하게 하는 그런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 우리 서방교에서는 성화인데 정교에서는 또 좀 다르게 얘기해요. 정교에서는 신화라고 해요. 인간을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신다고 하였지요. 인간이 하느님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이 거룩하게, 그 하느님. 그 높은 곳으로 하느님의 뜻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주셨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굉장히 탁월한 통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궁금해가지고 뉴스를 봤어요. 유튜브를 봤더니 밤새도록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은박지 같은 거 이렇게 하고 거기서 새벽 3시인데 거기서 새고 있는 게 나왔어요. 길에서 막 거기서 은박지 덮고 자고 그래서 너무 또 미안하기도 하고.
다 보니까 어리고 그래서 아휴 정말 나는 여기서 편안하게 이렇게 자고 일어나는데 정말 저런 사람들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어떤 고등학생이 한 얘기가 생각났어요. 자기네 엄마는 이찌기고 태극기 부대고, 자기 증조부는 친일파여 일본 순사랑 같이 막 웃으면서 사실, 손짓고 그렇지만 나는 그래도 여기에서 나와서 우리나라의 밝은 내일을 위해서 힘을 합치고 싶다 그리고 이것을 감추고 싶지만 감추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면서 우리의 미래를 더 좋게 만들겠다 이렇게 얘기하는 걸 보면서 감탄했어요.


아 그래, 우리가 남자 여자로 갈리고 나이대로 갈리고 빈부로 갈리고 그렇지만 그런 것을 어느 순간에 다 뛰어넘어서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멋있는 힘이 우리들 속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거 굉장히 불교적인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다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서로 다 연관이 되어 있고 그래서 더 높은 그런 내 작은 나가 아니라 더 큰 나로 나아간다라는 생각을 하니까 멋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서의 진리는 모두 이러한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어, 다른 사람의 고통과 갈망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이지요. 오늘 읽은 말씀 구약에 말씀이 선포된 것도 사실은 노예생활의 그 어려움 속에서 그 반추로부터 나온 것이고 또 메시아를 기다렸던 그 갈망도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하는 그 어려움 가운데서 나온 것이지요. 또 그리스도가 오시는 걸 기다렸던 그 수많은 마리아나 그런 데 나온 것이고 그들의 그런 역사로부터 나온 것이지요.

오늘 우리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열망하는 그것도 옛날에 서울의 봄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통해서 본 우리가 저런 어두운 그런 것들을 다시 돌아가면 안 된다는 그 어두움에 대한 그런 성찰로부터 이 밝음과 한 단계 높은 것으로의 길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제 새해가 됐는데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면 정말 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런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고 힘들 것도 있어요. 그런데 옛날에 곤도마리에인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집안을 정리하면서 많이 버리라고 그러잖아요. 버릴 때 이렇게 버리지 말고 버리는 그 물건한테 고마웠다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 그러면서 버리라는 거예요.

어쩐지 그게 좀 어리석은 일인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래요. 버리는 것도 그냥 확 이렇게 버리지 않고 그렇게 버리려면 좀 뭔가 마음에 더 못 버리는데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 그러면서 버린다고 하는 그 마음이 더 잘 버릴 수 있고 내 마음을 또 버리는 나의 이런 마음을 달래주는 면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난 한 해를 우리가 돌아보면서, 또 여러 가지 안 좋은 일도 있고 그래서 그것을 또 버리려는 마음, 새로운 것을 바라는 마음도 있겠지요. 하지만 성경에 나온 많이 기다렸던 사람들처럼 지난 우리가 살아왔던 그 과거를 정말 감사하면서 그 소원에 우리의 모든 소중한 순간들과 소중한 희망들을 다시 잘 추려서 밝아오는 이 해에 우리가 맞이해야겠습니다.


이 하느님의 진리가 우리가 알 수가 없죠.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알기 쉽게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 진리는 무엇입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겁내지 말고 하느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다. 또 미천한 우리들을 그 하느님의 높은 뜻에 그 우주적이고 커다란 그 따뜻한 꿈속에 우리들을 동참시킨다고 하는 그런 막연하지만, 실낱같은 성육신의 희망을 일깨워주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희망으로 오늘 이 시간의 기도를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희망을 품고 나아갑니다]

2024. 12. 29. 성탄1주일


아이들이 길을 잃는다는 것은 아이 자신과 부모들에게 모두 충격적인 상황입니다. 제 친구 중에 하나가 어렸을 때 길을 잃어버렸던 이야기를 하는데요. 그러니까 어머니 아버지하고 손을 놓치고 길을 잃어버려서 이쪽에 있는 소도시에서 저쪽에 있는 소도시까지 울면서 걸어갔대요. 그 고속도로를 따라서. 그동안에 이제, 집에서 막 찾고 난리가 났었죠. 근데 아이들은 길을 잃어버리면 그냥 앞으로만 간다고 그러더라고요, 울면서요. 그래서 그렇게 먼 길을 밤새도록 이렇게 걸어갔었던 그 얘기를 하는데, 그 아이는 얼마나 놀랐으며 그 부모는 얼마나 놀랐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도 사실은 공항에서 제가 영국으로 출장하는 날인데 잠깐 이렇게 딴 데 보고 있는 한 1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애가 없어져서요. 그날 출장할 비행기는 떠야 되는데 애는 2층, 1층 다 뒤져도 없고. 그래서 출장을 취소할 때쯤 됐을 때 어디서 전화가 온 거예요. 얘도 비슷하게 울면서 앞으로만 가다가 다행히 옆에 있는 어떤 아저씨한테 핸드폰을 달라고 해서, 전화를 한 거예요. 그래서 찾았던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도 어렸을 때 오늘 성경말씀 보면, 그렇게 좀 부모가 길을 잃어버린 얘기가 나와요. 근데 이게 이제 유태인들은 어떻게 되어 있었냐면. 그 당시만 해도 명절날(유월절)이 되면 다, 우리가 명절에 고향을 찾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예루살렘에 모여서 예루살렘에서 같이 예배를 하고 거기서 순례를 하고 집으로 가게 되어 있었고요. 요즘에 가족이 그냥 다 핵가족인데 그 당시만 해도 큰 친척들이 같이 내려가니까 애들은 애들끼리 막 사촌들하고 같이 해가지고 내려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 어디엔가 있겠지 그러고 내려가다가 나중에 알게 된 거죠. 그래서 이 부모가 그 길을 거슬러서 올라오면서 그 인파가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거 계속 걱정하면서 이거 우리 애기 완전히, 지금 엄만한, 아빠 혹시 얼마나 지금 그러고 있을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그런 것을 한 게 마리아가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왜 우리를 애태우르냐. 널 찾느라고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이런 얘기가 그래서 나오는 얘기죠.


그런데 오늘 이 장면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많이 들었어요. 우리가 하느님께 충실하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일관성 있게 살아야겠다고 열심히 살아가는데 인생을 살다 보면 그 전제 그렇게 열심히 이쪽으로 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하느님이 원했던 방향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라는, 그런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유치한 예를 들면, 제가 사제로서 30년을 살고서 하느님 앞에 섰더니, 그래서 ‘하느님이 전 열심히 주님의 일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하면요. 그런데, 그런 비유가 있죠. ‘나는 네가 뭐 했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나오잖아요. 그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이 방향으로 한다고 했던 그것 자체도, 하느님께서 ‘그것도 아닐 수도 있어’ 라고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통해 보았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안전하게 잘 보살피고 양육하는 것이 최고의 의무이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 당신은 그보다는 ‘이스라엘이 갈 길과, 이 인류가 앞으로 어떻게 가야 될 것인가’를 거기에서 같이 의논하고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하시는 거죠. 이러한 이 괴리감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느낄 때가 많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우리들에게 오는 축복들도 너무나 우리가 기대하지도 못했던 큰 축복들이 우리들에게 정말 아무 값 없이 주어지는가 하면, 또 우리가 누렸던 그런 것들이 어느 순간에 또 위협을 받거나 사라지게 되거나 또한 이 세상을 떠나야 되는 그런 상황을 만났을 때 우리는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굉장히 마리아와 요셉처럼 큰 축복을 누리는 생활 속에서도, 질문과 곤경에 빠지게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 엄무광 선생님의 ‘향심기도 강연’ 테이프를 듣고 있는데, 계속 내려놓는 훈련을 시키더라고요. 그분은, 생각들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기도할 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자꾸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내려놓는 연습을 하라고 하는 데요. 그 이유는, 우리가 가장 중요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도, 하느님 앞에서 내려놓을 수 있고 상대화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우리가 항상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끊임없는 충실함으로 나아가되, 주님 앞에서 그 또한 내려놓으라고 했을 때는 기꺼이 내려 놓을 수 있는 지극한 충실함으로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될 것은 이 신실함과 같은 말이 끊임없는 사랑이라고 하는데요. 변함없는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 신실하신 하느님의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항상 마음 아파하시고 정말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는 주님의 신실하심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함께 모여서 예배를 준비하면서 조금 일찍 오신 분들과 나눈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난해가 너무 어려운 한 해였고 너무 위험한 것도 많은 한 해(제주항공 폭발 사고 등)였는데 앞으로 오는 해도 좀 걱정이 된다. 어떤 분이 그러셔서 우리가 좀 서로 그래도 우리 새로운 해를 희망으로 맞이하자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이런 뜻밖의 일들을 만나고 그렇지만 우리가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끊임없는 사랑, 신실하심, 하느님의 그런 자비하심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가야겠습니다.

우리 앞에 어떠한 기쁜 일과 슬픈 일과 어떤 소망과 또는 절망이 닥치더라도 항상 그러한 신실함을 귀히하고 꾸준히 살아가는 우리 한해가 지난 2024년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 동터움을 느끼고 그런 새해를 맞이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우리 잘 사라지기로 해요]

2023. 12. 22. 대림 4주일


안녕하세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이콘 중에 하나가 성모 왕문 – ‘성모께서 엘리자벳을 방문하시다’라는 이콘이에요. 나이 많은 여자 한 분과 나이 젊은, 파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가 서로 손을 맞잡는 그 그림이 저는 참 좋더라고요.
당시에 마리아로서는 예수님을 잉태하는 것 자체가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가 없는 그런 기적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이게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을 거예요. 이미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에게 얘기할 때, ‘은총이 가득하신 이여’ 이런 얘기하잖아요. 그게 사실은 그 당시에 굉장히 귀족층이라든가 왕족 이런 사람들한테 붙이는 칭호래요. 그런데 그냥 갈릴레아 뭐 이런 데 살고 있는 그냥 시골에 있는 젊은 아가씨한테 천사가 나타나서, 마치 저기 고위층에게 얘기하듯이 은혜를 가득히 받으신 이어 이렇게 얘기하니까, 마리아가 그때 굉장히 깜짝 놀라면서 그 이야기를 들었죠.


하지만 인간은, 천사의 계시도 필요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들의 인정과 공감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엘리자벳도 그 당시에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아이를 갖게 된 가졌잖아요. 그래서 그 얘기를 듣고 나하고 비슷한 사람이니까 나에게 뭔가 위로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있겠다. 그래서 찾아갔었을 것 같아요. 산동네에 살고 있는 엘리자벳에게 찾아가서 여기 보면 세 달 정도 있었다고 해요. 그 당시에 사회에 그걸로 봐서는 제 약혼한 상태인데, 일찍 임신한 것이 금기시되고 그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아기가 낳을 때까지 거기에 오랫동안 머물렀죠.


그렇게, 우리 인간은 살면서 정말 어떤 그런 공감과 옆에 있는 사람들이 ‘괜찮아’라고 이야기 해 주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참 그런 기억이 어렸을 때 있었나 생각을 해보니까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정말 그런 분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전학을 가면서 굉장히 많이 위축이 돼 있었고 그 당시 학급이 60명 70명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학생들 한 명 한 명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기가 어렵고, 저는 주로 야단을 많이 맞고 살았는데 5학년 때 선생님은, 잘한 것 같지도 않은데, ‘야 너 참 잘했다’ 이렇게 몇 번 해주셨어요. 그런데 그게 저한테는, ‘그래도 우리가 선생님이 좋아하는구나’ 이런 느낌을 가져서 그때 좀 자신감도 생기고 학교에 가는 것도 더 좋아졌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기억에 나는 걸로는 몇 번 되지 않지만 그 짧은 그런 몇 마리가 힘을 주었어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남의 짐을 져주기는 정말 어렵고 자기의 그런 짐을 지고 가기도 벅차지만, 그 중에 조그만 무언가를, 다른 사람에게 한 5천 원어치라도 던져 줄 수 있으면,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큰 삶의 운동력이 되기도 하고 새로운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계시만 가지고서는 부족한 옆에 있는 누군가가 사람이 격려해지고 위로해주는 것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입니다.


대림절기도 다 지나가고 이제 자주색 영대를 하는 날도 이제 다 끝나고, 대림초 네 개도 다 이렇게 켜지니까, 아 정말 한 해가 저무는 감회가 새롭습니다. 요즘 집에 있는 사진첩들을 다 청소하면서 봤더니 옛날에 찍어놓은 사진들이 있어요. 근데 20년 전 사진을 보니까 ‘아 이런 때도 있었네’ 하는 생각이 들고, ‘아 그 이때도 살아 있었구나’, 그래서 굉장히 낯설게 옛날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요즘에 ‘안리타’라고 하는 분의 시집을 지금 두 권째 읽고 있는데 거기에 ‘살아진다 사라진다’라고 하는 시집입니다. 올해를 마감하는 저의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이 시인이 살다 보니까 사는 맛이 없을 때도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살고 싶지 않다’ 그래도, 살아지는 거예요. 그리고 ‘살고 싶다’ 그런 때도 똑같이 살아지는 거죠. 그런데 또 한편, ‘떠나가지 말라고 해도 떠나가고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그 계절 속에서 내가 이렇게 나의 하루하루가 사라지고’, 그렇게 저의 올해 한 해가 사라지는 것처럼, 시인의 인생도 그렇게 사라져가고 있죠.
그래서 우리가 원하든 안 하든 우리가 살아가고 있고 사라지고 있는 이 순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네요. 마지막 구절만, 세 문장이니까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네, 살고 싶지 않아도 살아지고 살고 싶은 날에도 살고 있는
이런 알 수 없는 생의 한가운데를 올해 서성입니다.
단지 우리 잘 살아지기로 해요.
그리고 우리 잘 사라지기로 해요.

제가 희년교회에 온 지 조금 시간이 지나서, 이제 서로 조금 편해질만큼 시간이 흘렀네요. 이곳에 와서 저희가 나눈 것은 굉장히 적지요. 주일날 1시간, 2시간 나눈 거지만 그것이 서로들에게 힘이 될 때도 있고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라지고 있는’ 소중한 시간, 우리가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살아지고 있는 이 시간에, 조그만한 그런 격려와 힘이 서로에게 될 수 있는 그런 공동체로 2025년을 맞을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성모가 엘리자벳을 만난 그 기쁨으로, 우리 서로에게 격려가 되는 이 기도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리뷰: 디지털 문화 속에서의 선교와 훈련

이번에는 감리교 선교신학자 필립 미도우즈Philip R. Meadows의
‘디지털 문화 속에서의 선교와 훈련’Mission and Discipleship in a Digital Culture에 대하여 소개하려 합니다.
미도우즈는 ‘전도와 제자삼기’, ‘선교적 교회론과 교회개척’, ‘오늘의 문화 속에서 선교하기’, ‘웨슬리 신학과 영성’의 전문가이며, 디지털 문화 속에서의 선교 참여와 서구의 세속화 문제 등에 대한 많은 학술 논문을 발표했는데 최근의 발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 웨슬리 DNA의 훈련: 21세기 교회를 위한 훈련의 새로운 표현들
    The Wesleyan DNA of Discipleship : Fresh Expressions of Discipleship for the 21st Century Church (Grove, 2013)
  • 세례를 기억하라: 웨슬리 영성의 훈련과 선교
    Remembering Our Baptism : Discipleship and Mission in the Wesleyan Spirit (Discipleship Resources, 2017)
필립 미도우즈 박사

이 논문에서 미도우즈가 분류한 디지털 문화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세 가지 경향성은 현대 코비드19로 인한 언텍트 사회와 목회에 적용할만한 틀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디지털 변혁의 파장을 ‘수렴의 관점’perspective of convergence에서 선교와 훈련의 방향으로 재정립할 것을 이 논문에서 그는 제안합니다.

수렴의 관점

저자는 새로 부상하는 디지털 문화가 낡은 미디어(또는 디지털 이전의 방식)을 완전히 대치하게 될 것이라는 ‘디지털 혁명’의 관점에 그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 것과 낡은 것, 디지털 미디어와 전통적 미디어가 전례 없는 복합적인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수렴(융합)할 것이라는 젠킨스Jenkins의 의견에 그는 동의합니다.
(수렴의 문화: 새 미디어와 낡은 미디어가 부딛치는 곳Convergence Culture: Where Old and New Media Collide)

칸 아카데미에 소개된 수렴에 관한 설명

그래프를 보면 x축 위에서 접근하는 선과 아래에서 접근하는 선이 점점 0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도우즈에 의하면 ‘수렴의 원리’principle of convergence란 ‘인간의 삶(관계들와 공동체)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다양한 전통들과 관행들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미디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방식과 디지털 방식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일상생활)로 점점 가까워져 융합된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이 일상생활이란,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 일터에서의 협업, 여가시간의 사용, 쇼핑, 세금 납부, 정책 결정 참여 등과 같은 방대한 영역, 방식의 개편이 이루어지는 모든 분야들을 의미합니다. 이 논문의 목적은 1)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디지털 문화’가 새로운 시대의 약속인지 함정에 불과한지를 살펴 보고, 2) 선교와 훈련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한 광범한 (디지털 문화의) 의미들(암시들)을 탐구해 보는 데에 두고 있습니다.

데이빗 벨의 디지털 문화론

저자는 데이빗 벨David Bell의 ‘사이버문화 개론’An Introduction to Cybercultures에서 소개한 물리적, 상징적, 체험적 설명을 소개하여 ‘디지털 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을 잡습니다.

1 물리적 접근

디지털 문화에 대한 물리적 설명은 컴퓨터와 디지털 장비와 인터넷의 기원과 발전과 활용으로 오늘의 일상 생활은 점점 더 디지털 미디어의 ‘가상 영역’virtual realm에 잠겨들고 있다고 합니다. 이 접근방식들은 주로 도구들, 양식들, 기능들에 집중하며, 모든 곳을 둘러싸고 있는 ‘유비쿼터스 컴퓨팅’ubiquitous computing 환경, 가정과 일터와 노동과 여가의 상호연결interconnecting의 패턴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 디지털 네트웍들이 현대사회의 주요한 조직 모드가 되고 있다.
    (판 디에크Van Dijk의 ‘네트웍 사회: 새 미디어의 사회적 측면들’Network Society: Social Aspects of New Media).
  • 소셜 미디어가 전통적인 사회관계들을 대체하는 현상.
  • 아바타avatar가 가상 공간에서 취직도 하고, 땅도 사고, 집도 짓고, 교회도 가고, 결혼도 하고, 정착도 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관한
    (팀 게스트Tim Guest의 ‘제2의 인생: 가상 세계로의 여행'(Second Lives: A Journey Through Virtual Worlds).

수렴의 관점에서 보면 ‘디지털 공간에 거주’ 는 가상 네트워크가 대화식으로 일상 생활의 흐름에 접해 있는 생활에 몰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포스트 데스크탑’ 세계에서 가상공간cyberspace는 ‘저 밖에 있는’ 비현실적인 영역이라기 보다는, 광범한 정보 교환과 사회 관계들을 위하여 디지털 장비들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일상 생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2 상징적 접근

디지털 문화에 대한 상징적 설명은 소설과 예술과 영화를 통하여, 우리와 기술의 관계를 상상하고, 미래에 대한 우리의 희망과 두려움에 관한 설명을 하는데 그 유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트루먼 쇼우Truman Show와 매트릭스Matrix에 나오는 것처럼, 기술과 사회가 융합되어, 배후의 사회정치적 세력들이 디지털 미디어를 사용하여 현체제status quo를 유지하도록 우리를 길들인다는 이야기들.
  • 우주 여행Star Trek과 이백년의 사람Bicentennial Man에 나오는 것 같이, 기술과 몸이 융합되어, 디지털 임플란트와 로봇 보철, 핸드헬드 컴퓨터와 블루투스 이어폰, 유전공학, 노노 기술, 로봇 공학의 개발을 통해 인간 유기체에 가까워진 기술, 기계와 인간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
  • 트론Tron과 잔디깎는 사람Lawnmower Man에 나오는 것 같이, 기술과 생각이 융합되어, 우리의 의식을 업로드하거나 디지털 기술로 낚아채어, 우리 생각(마음)의 소프트웨어를 우리 육체의 ‘웻웨어'(wetware, 기계를 뜻하는 하드웨어에 비하여 우리 몸을 가리킴)로부터 분리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들.

이런 상징적 질문들을 통하여 디지털화된 포스트 모던 사람들은, 기술적 숙달과 조작의 환상을 넘어서는 진짜 자아, 진짜 관계, 진짜 공동체 같은 것이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3 체험적 접근

디지털문화에 대한 체험적 설명은 ‘원격 대면’telepresent로 요약할 수 있는데, 시간과 공간으로 떨어져 있는 어딘가에 또는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느낌을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얼굴을 대면하는 만남의 가치를 이러한 ‘원격 대면’의 체험이 재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합니다. 아무리 원격 대면의 기술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맛 보고, 냄새 맡고, 만지는 구체적인embodied 친구와의 대면을 대치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매체가 다른 사람들과 더 연결되어 ‘항상 켜져 있는’always on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부재(외로움absence)의 감정을 극복하게 해 주고, 시공의 한계들을 넘어 풍부한 체험들을 나눌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나 이 또한 혼자 있기를 갈망하는 사람들과, 텍스트, 트윗, 현재상태 업데이트등의 스트리밍 문화에 떨어지지 않고 주의글 기울이려는 사람들 사이의 체험의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항상 켜져 있음’의 중독과, 얼굴을 대면하는 심도 있는 만남의 대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게 됩니다.

위의 세 가지 이야기들에 대한 미도우즈의 요약은 이와 같습니다.

요약하면, 디지털 문화는 일상 생활에 가상적 차원을 추가합니다.

한 편으로 디지털 기술은 우리의 구체적(현실의) 관계들을 여러 측면에서 향상시키고 확장시켜 주지만, 우리의 삶을 여러 다른 영역들로 분리시켜 구획화compartmentalize 시켜 버리거나, 가상의 생활 그 자체를 목적(주객전도)으로 삼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 디지털 매체의 분리하는disembodying(구체적 형태로부터 자유롭게하는) 효과는 우리의 가상적인 삶에 엄청난 자유와 유연성을 가져다 주지만, 설득력 있는 ‘시뮬레이션’ 뒤에 중대한 손실들을 은닉하고, 온전한 인간 관계들에 덜 정착하도록 유혹할 수 있습니다.

이 ‘구획화’와 ‘분리’의 긴장들은, 성육신하신 구세주의 모본을, 온 삶으로, 선교하는 제자mission-shaped disciples로서 따르려는 이들에게 심각한 도전을 제기합니다.

디지털 문화 속에 거주하기

디지털 원주민과 이주민은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는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려는 이들에 대한 위와 같은 디지털 문화의 도전에 대응하는 방식을 분류하는 데에 미도우즈는 프랜스키(Marc Prensky, 디지털 원주민과 디지털 이주민Digital Natives, Digital Natives)의 디지털 원주민과 디지털 이주민에 대한 문화적 연구에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구도 ‘타고나면서부터 디지털’born digital일 수 없고, 태어나면서부터 토착화된inculturated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선교학적으로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에 대한 입장을, 디지털 외계인digital alien, 디지털 선구자digital pioneer,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미도우즈에게 독특한 것은 이 세 가지 경향성이 각각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한 사람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는 상호 모순되면서도 상존하는 양가 감정 또는 태도로 본다는 것입니다.

1 디지털 외계인

이들은 무비판적인 기술의 도입에 대해, 성서적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깎아내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저항합니다. ‘기술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주요한 이야기들은 성서에 관한 것이어야 하며, 우리는 매우 ‘전통적인’, 디지털 이전pre-digital 뿐 아니라 근대 이전pre-modern한 생활 양식에 자리잡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관계하시는 매개체로서, 주변 백성들로부터 구별하여 부른 거룩한 백성의 형성을 통해서, ‘몸으로’in the flesh 하느님 현존의 실재reality와 아름다움을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이들에게 성서적 교회란 함께 직접 빵을 떼고 서로 발을 씻겨 주는, 더불어 사는 것을 체현하는 성육신은, 가상의 형태로 온전히 표현될 수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여기서 미도우즈는 역설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물리적으로 모인다는 것이 그렇다면 서로가 진정 현존really present(서로를 진정으로 느끼는)을 보증하느냐는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같은 곳에 머문다고 해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얼굴과 얼굴을 직접 대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삶을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의 영적 뿌리는 실제 영역이나 가상 영역 모두에 뻗어 있어, 하느님의 선교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을 약화시킵니다.

2 디지털 파이어니어

이들은 전도와 훈련과 공동체를 탐험(실험)할 수 있는 디지털 공간의 잠재력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스도인 삶의 ‘전통적’ 표현들은 디지털 기술들과 상호작용에 매개될 수 있다고 봅니다. 성서적 그리스도교가 현실과 가상의 양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봅니다. 디지털 외계인이 디지털 미디어의 힘이 우리의 제자도를 잘못구성mis-shape한다고 저항한다면, 디지털 파이어니어들은 디지털 미디어의 힘을 장악하여 우리의 사역을 재구성re-shaping하는 데에 사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가상 교회의 다양한 실험들을 소개합니다.

여기서도 저자는 디지털 외계인의 입장에서 파이어니어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아바타가 된다는 것은 성육신한다는 것과 같지 않으며, 복음은 전송하기 편한 비트와 바이트의 정보로 디지털화 할 수 없다는 점, 가상의 복음은 편하고 안전하고 즉각 접할 수 있는 상품commodity으로 왜곡되어, 포스트모던 개인주의의 갈망들을 살찌우며, 영성을 내적 종교 체험의 추구로 축소시키고, 사목을 개인의 영적 여정을 위한 가상의 사역chaplaincy로 바꾸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놀라운 점은 이런 가상 교회에 대한 비판은 전통적 교회에 거울처럼 반사시켜, 제자도 전반in general(전통적 교회를 포함하여) 소비주의와 개인주의는 오래 앓아 온 역병과 같은 문제였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가상의 교회가 실재 교회와 반목하는 것이 아니고, 가상의 교회가 전통적 교회를 대체하는 것도 아니고, 서로 보완하면서 그리스도교 제자도와 공동체의 표현들을 함께 풍성하게 해 줍니다.

3 디지털 원주민

디지털 외계인이 실재embodied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디지털 파이어니어가 가상virtual 공동체의 잠재력을 강조한다면, 디지털 원주민은 양자(실재와 가상)를 통해 표현되는 영적 우정의 네트웍에 소속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 합니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몇 권의 참고 도서를 권해 주고 있습니다.

  • 아담 토머스Adam Thomas, 디지털 제자: 가상 세계 속의 진짜 그리스도교Digital Disciple: Real Christianinty in a Virtual World.
  • 엘리자벳 드레셔Elizabeth Drescher,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트윗하세요: 디지털 변혁 가운데 교회를 실천하기Tweet if You Love Jesus: Practicing Church in the Digital Reformation.
  • 제시 라이스Jesse Rice, 페북 교회: 초연결성이 어떻게 공동체를 재구성하고 있나How the Hyperconnected are Redefining Community.
  • 렉스 밀러Rex Miller, 새천년 매트릭스: 교회의 과거를 되찾고 미래를 다시 구성하기The Milenium Matrix: Reclaiming the Past, Reframing the Future of the Church.

이들은 가상 교회들이 전통적 표현들을 단지 흉내내기만(시뮬레이션simulate) 한다면 그런 곳에 참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들이 관심있는 것은 진정성authenticity입니다. 디지털 원주민들은, 집에서든, 특별히 마련된 성소에서든, 스타벅스와 같은 만남의 장소든, 페북과 같은 가상의 네트웍이든, 그리스도인들이 친교(상통)을 위하여 모일 때마다 어떻게 교회가 형성되어갔는지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연결적인(하는) 공간들’connective spaces로서, 함께 흐를 수 있고, 진짜real 사람들이 하느님과 그리고 서로와 변혁적인transforming 관계들을 형성하고 지속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디지털 외계인들이 매체에 저항하고, 디지털 파이어니어들이 메체를 재형성한다면, 디지털 원주민의 기본 입장은 매체를 ‘리믹스’remix, 다시 섞어 재창조한다는 것입니다. 이 리믹스된 관계들에는 실재와 가상의 삶 사이의 구분이 필요가 없습니다. 육신flesh이 가상적 관계들을 통해 원격 대면telepresence이 되는가 하면, 원격 대면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모임들을 통하여 육신이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택하신 매체가 디지털 문화를 위하여 리믹스된다면, 디지털 외계인들은 진짜 상실들이 확신을 주는 시뮬레이션 뒤에 감춰어지고, 일상 생활이 가상 이미지 속으로 재형성되고 말 위험에 대해 지적합니다. 이것이 실재 현실이 방치되는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실재 사람들이 육신 안에서 초실재hyper-reality의 습관을 을번시킴에 따라, 깊이와 진정성의 상실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디지털 문화의 위험은 우리가 덜 인격적으로personal 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 가운데 항구적으로 ‘몸을 벗어난 체험’을 하며 살아가는 초인격hyperpersonal이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즉 (직접 접하는) 이웃들을 위한 얼굴과 ‘항상 켜져 있는’always on(가상의) 관계를 위한 이중적인 얼굴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성으로 서핑을 하면서, 계속 부분적으로만 주의를 기울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온전히 대면하지 않을 위혐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덜 관계를 맺는 위험이 아니라, 초친밀함hyperintimate, 즉 계속 (때로는 분별 없이) 공중이 소비할 개인적인 메시지들을 과하게 나눈다는oversharing 것입니다.

디지털 문화에 참여하기

저자 미도우즈는 디지털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사는 것에 관하여 영성, 훈련(제자화), 친교(상통), 전도의 영역에서 분석을 계속합니다. 그의 수렴적 관점에서 보면, 삶의 가상적 차원은, 온전히 현실화된(실재의) 제자도를 대체하기보다는, 증대시키고 확장합니다. 하지만 가상적 생활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으려는 열망은, 소위 ‘진짜 교회’ 안에 내재하는 영적 질병의 증상으로 보입니다. 공허한 예배, 창백한 친교, 엷은 실천들, 진정한 생활의 것들과 단절된 모든 것들은, 영양부족인 영혼들과 영적 의기소침함을 초래합니다.

저자는 디지털 문화 속에서 전개하는 선교의 미래는, 온라인 세계 속에 가상 교회를 개척하는 데에도, 전통적인 교회를 기술적으로 더 향상시키는 데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지역 교회가 ‘훈련을 하지 않는다면’not making disciples, 기술을 포용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정한 제자도의 추구’가 없다면, 가상 영역에 진짜 증언도, 가상 영역의 유익을 분별하는 것도, 위험을 감수하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저자는 영성과 훈련과 친교와 전도의 영역에서 이제 구체적인 분석을 시작하지만, 저의 요약은 여기에서 멈추려 합니다. 리뷰의 글로 시작했는데 자꾸 욕심이 나서 세세한 요약을 계속 하게 되었습니다. 독자가 이 논문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 리뷰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더 자세한 것은 잠시 여러분들께 맡겨 드리고 싶습니다. 이 논문에는 요약이 담지 못한 생생한 개념정의, 분석, 묘사들과 무엇보다도 풍부한 자료 소개가 있습니다.

코비드19로 인하여 디지털 외계인과 파이어니어의 토론과 논쟁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이 때에, 미도우즈의 분석과 분류는 전반을 볼 수 있는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점점 떠오르고 있는 디지털 원주민과 이 문화에 더 익숙해지는 사람들과 경험들이 어떤 특징과 약점을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도 도움이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대면 예배를 계속하겠다’는 극단적인 표현과 또 그 반대의 입장들에 대하여 진영이 나뉘는 것 같은 한국의 현실에서, 외계인과 파이어니어와 원주민의 경향이 모두의 마음 가운데 동시에 존재한다는 그의 통찰은, 우리가 어떤 입장을 악마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함께 접근해 가야 한다는 섬세함을 가다듬게 해 줍니다. 물론 이런 논쟁의 가치와 아픈 과정의 필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되겠지만,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양심을 한 번 더 기다려 보게 해 줍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디지털 문화의 쟁점을 외부가 아닌, 진정한 훈련,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제자화에 두고 있는 점입니다. 상황이 어떻게 변하던 이를 더 진정한 교회로 거듭나는 기회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디지털 문화의 격변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참여하려면 어떤 영성, 훈련, 친교, 전도를 하여야 할지 더 깊게 생각하고, 저자의 글을 통하여 함께 더 깊어지기를 바라며 이 소개의 글을 마치려 합니다. +

도토리와 세상의 빛

 이번 책가방 축복식 선물은 도토리예요. 동글동글하고 토실토실한 도토리가 참 예쁘지요. 옆에 다람쥐가 같이 있으면 더 좋겠지요. 올해는 대한성공회가 한국에 온 지 130년이 되었어요. 그 옛날에 성공회 교회를 시작한 사람들은 도토리 나무를 참 좋아했던 것 같아요. 1911년 주교 서품식에 영국에서 보낸 선물을 보면 대한성공회 마크와 도토리 가지가 함께 새겨져 있어요. 대한성공회 마크를 자세히 보면 십자가 주변에 도토리 나무잎 무늬로 장식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지요.

도토리 나무가 이 문장을 디자인 한 분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는지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당시 산 위에 올라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도토리 나무, 상수리 나무에서 한국의 자연, 한국의 산과 강에 대한 느낌을 받은 것 같아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 속에서 금과 은으로 장식할 대한성공회의 비전을 떠올린 사람들이 멋있게 느껴지네요.

올해 서울교구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좋은 마음 좋은 행동으로 빛나는 생활을 하기로 하였어요. 그런데 크고 환한 빛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결심과 희망과 실천으로 시작되는 것이겠지요. 도토리 나무가 햇빛을 받아 도토리 한 알 한 알을 열매 맺으면, 귀여운 다람쥐들은 추운 겨울에도 오손도손 마주앉아 도토리를 먹으며 힘을 내겠지요.

여러분도 이 선물을 보면서 그런 마음을 되새겼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눈여겨 보지 않는 평범한 하루 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옆에 있는 사람들 속에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면 좋겠어요. 도토리처럼 작고, 단단하고, 알찬 여러분의 빛을 기대합니다.

2020년 3월 5일 목요일
시몬 다람쥐 올림

기도를 향한 열정 – 사라 코클리

지난 2019년 5월 25일과 26일 새문안교회에서 사라 코클리Sarah Coakley가 주었던 메시지의 여운은 지금도 잦을 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몇 가지 열쇄말을 이해해야 한다. 

1. 기도와 갈망

한국어 번역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이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갈망desire을 ‘욕망’으로 번역한 것과, 둘째는 수덕생활asceticism을 ‘금욕주의’로 옮긴 것이다. 사실 욕망이라는 번역이 지닌 장점도 있는데, 기도가 인간들의 욕구와 욕망을 배제시킨 추상적인 무엇이 아니라, 온갖 바램과 희망과 허영이 뒤섞여 응어리진 마음을 다 가지고 하느님을 대면하는 것이라는 것을 드러낸 점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욕구와 욕망이라는 용어로 담아 낼 수 없는 광대한 영역이 있다. 코클리는 기도를 만유 또는 온 세계를 향한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과 기도라는 스케일에서 이해를 하고 있다. 이것이 기도의 본 줄기라고 한다면 ‘성령의 욕망’ 또는 ‘성령의 욕구’라는 표현 보다는 ‘성령의 갈망’ 또는 ‘성령의 갈급함’이라는 표현이 더 가까운 것 같다.

르고 마음 속에 새로운 스파크를 일으킨다. 그의 발표는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 묻혀 있는 기도 생활의 광맥을 보여 주었지만, 그만큼 생소한 용어들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이 낯선 개념들이야말로 기도 생활의 영역을 넓혀 주는 뜻밖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자 사라 코클리Sarah Coakley 박사가 언더우드 국제 심포지움의 강사로 방한하여, 새문안교회에서 2019년 5월 25일과 26일 이틀에 걸쳐 세 차례의 강연을 진행하였다. 그는 ‘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도록 한국 교회를 촉구하였다. 그에 의하면 기도란 ‘모든 피조물을 위한 성령의 말할 수 없는 깊은 탄식과 간구에 참여하는 것이며, 자그마한 파편인 개개인의 갈망이 하느님의 갈망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강연 주제는 “기도, 욕망, 성: 오늘을 위한 삼위일체론의 재해석”인데, 그것은 크게  3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1. 기도, 성, 욕망의 상호관계
  2. 삼위일체 교리의 원천인 기도
  3. ‘고전삼위일체신앙과 현대’의 기도, 성, 욕망에 대하여

이 강연을 잘 이해하려면 욕망(갈망), 성, 금욕주의(수덕생활)와 같은 용어를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1. 욕망desire

욕망desire: 고전 신학에서는 욕구needs와 갈망desire를 구분하기도 하였는데, 욕구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세상에서 채워질 수 있는 것이라면, 갈망은 하느님만이 채우실 수 있고 이 세상에서는 채워질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코클리는 기도의 원동력이 갈망이라고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모든 바램과 목마름이 결국에는 영원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큰 바램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개인의 욕구와 신적인 갈망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은 샘이다. 그렇기에 욕망이라는 번역도 맞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용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코클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걸러지지 않은 욕망을 하느님 앞에 가져와 하느님 의지에 맡겨 드림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검증test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자리 찾기’modulization라는 표현도 사용하였다. 깨어진 파편에 불과한 욕망이, 만유를 위한 성령의 갈망을 만나 자리를 찾게 되는 과정이 기도라는 것이다.

2. 성gender

코클리는 성에 대하여 ‘gender’와 ‘sex’라는 두 단어를 병기하였지만, 이 강의에서 이 두 용어에 대해서 특별히 논한 바는 없다. 나는 여기에서 ‘성’은 사실상 인간의 몸body이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마음soul이라고 하거나, 인간의 온갖 욕구와 갈망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갈망이 ‘영’spirit에 관한 것이라면, 욕구와 갈망이 섞여 있는 인간soul은 여러가지가 섞여 있는 구체적인 존재이다. 성육신은 영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의 몸과 마음과 성이라는 구체성 속으로 임하신 것이다. 기도 가운데 몸을 지닌 사람들의 갈망이 하느님의 갈망으로 통합되어 간다. 기도를 주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갈망이다. 인간의 몸, 마음, 성, 욕구에는 하느님의 뜻과 그에 반하는 것, 중립적인 것 등이 섞여 있는데, 우리는 그 모든 욕망을 지니고 하느님 앞에 나와 그것을 그분께 개방해 드림으로써, 하느님의 손길 속에 하느님의 갈망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렇기에 코클리는 기도에서 ‘갈망’이 ‘성’보다 주요한 측면을 이룬다고 하는 것이다.

금욕주의asceticism: 이 용어가 ‘훈련’이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하기에, 수덕생활, 수덕주의, 영신수련 등으로 옮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는 시민들이 전투에 나갈 수 있도록 신체 단련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수덕asceticism이란 몸을 강인하게 훈련하듯이, 영적인 단련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신자가 되기 쉬워지고, 박해 시기의 열심과 헌신이 약해지면서, 사막 등에서 기도 생활에 전념하는 공동체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영적 열심과 훈련을 뜻하는 수덕생활이 수도원을 연상시키게 됩니다. 코클리 강연의 결론이 ‘새로운 수덕주의’a new asceticism of desire인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용어를 금욕주의라고 번역하는 데에서 오는 오해는, 기도가 인간의 모든 욕구와 갈망을 포괄하는 열정인데 그것을 배제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점과,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더 깊이 머무려는 갈망을 외형적인 금욕과 자기 공로로 퇴행하는 형식주의로 오해하게 할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모든 갈망을 가지고 나오지만 하느님 뜻에 내려 놓는다’는 표현은 향심기도 등을 실천해 본 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구체적인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는 심상이 떠오르기 어려운 표현이리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할수록 명료해지기 보다는 어둠을 지나간다’는 등의 교부들의 기록들도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개신교의 유서 깊은 교회인 새문안 교회에서 ‘갈망의 새로운 수덕생활’을 접하게 된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간 한국의 성공회에서 많은 분들이 지켜 오고 일구어 온 영적 유산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