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던 터였으므로 요한을 보고 모두들 속으로 그가 혹시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러나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머지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그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17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 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 21 ¶ 사람들이 모두 세례를 받고 있을 때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고 계셨는데 홀연히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에게 내려 오셨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수님에 대한 복음 메시지에서는 시편의 노래와 춤이 배경음악처럼 흐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신 말씀은 시편 22편의 울림을 저희에게 전해 줍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들러온 ‘너는 내 아들이다’라는 말씀은 이사야 43장의 울림을 불러 일으킵니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성서 시대에 가까웠던 예수님 당시의 독자들은 마치 우리가 트로트나 K 팝 가사들을 알듯이 이 곡조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1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건져주지 않았느냐? .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람이다. 2 네가 물결을 헤치고 건너갈 때 내가 너를 보살피리니 . 그 강물이 너를 휩쓸어가지 못하리라. 3 나 야훼가 너의 하느님이다. .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내가 너를 구원하는 자다. . 이집트를 주고 너를 되찾았고 . 에티오피아와 스바를 주고 너를 찾아왔다.
우리도 그런 떠올릴 노래가 있습니다. 저는 ‘힘들고 지쳐’로 시작하는 찬양곡을 알고 있습니다.
당시 공화정은 세습을 방지하기 위하여 로마 집정관 또는 대통령 후계자를 다른 집안에서 데려오는 관례를 유지했는데, 그 후계자 지명식에서, 이 사람은 나의 아들이다, 나의 딸이다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런 존귀와 권능을 지니셨다면, 우리도 그와 같은 존귀와 힘을 갖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 곡은 소리쳐 외치는 ‘락’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락 스피릿’에 대하여 ‘자신을 지탱해 온 힘’이자 ‘자신의 피를 끓게 만드는, 용암처럼 뜨거운 무언가’라고 했습니다(인용: “락스피릿이란 무엇인가” ohdeok). “클래식에도, 발라드에도, 재즈에도, 고3 수험생에도, 월급쟁이에도, 실망한 사람에게도 있는,” 이 도전의 힘이, 예수님 세례를 형상화한 이 곡 속에도 느껴집니다.
이러한, 죽음의 물에서 나와 의연히 서 계신 예수님과 같은, 변화의 힘, 분출하는 끈기와 생명력이 여러분의 한 해에 충만하기를 빕니다.
10 ¶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 12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14 ¶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15 ¶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치기를 “그분은 내 뒤에 오시지만 사실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한 말이다.” 하였다. 16 ¶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 17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18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주셨다.
올해 새해 첫 예배인데 이 새 예배를 요한복음 1장으로 시작하니까 너무 감회가 새로운 것 같아요. 전에 요한복음 1장이 화려하게 적힌 액자가 있어서 알아 보았더니, 오래 전 라틴 전례에서는 미사가 끝날 때마다 사제가 제대 위에서 요한복음 1장을 읽었다고 합니다. 성육신의 신비를 신자들과 함께 묵상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요한복음 1장의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정말 기쁜 소식과 신앙의 진리를 정말 깊게 담고 있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하느님의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직접 오셔서 정말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맡겨주셨습니다. 성육신의 신비 또는 강생의 신비가 얼마나 우리들에게 큰 기쁨인가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것 같아요.
누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개신교는 공생애의 종교다 이렇게 얘기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같이 제자들과 사람들과 함께 시련도 당하시고 어려움도 겪으시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시는 거기에 굉장히 초점을 나누고 있다고 한다면.
정교회는 부활의 포커스가 있다 이런 얘기를 해요. 그래서 부활에서 정교회는 굉장히 부활심장이에요. 부활심장이 중요하고 승리하신 그리스의 영광에 굉장히 초점이 맞춰져 있죠. 그래서 러시아 대문호 중에 부활이라는 글을 쓰신 분도 있고 그런 게 굉장히 우연이 아니다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리고 가톨릭에는 뭐가 포커스냐 그러면 굉장히 고난에 초점을 맞춰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 그리고 거기서 온 세상의 인류를 위해서 고통을 받으신 주님 앞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이렇게 들었어요.
그에 비해서 성공에는 어디에 초점이 있냐 라고 하면 어디에 있는 것 같아요. 이 성공에는 대단히 성육신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이렇게 오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 우리 성공회에서는 이 성탄절기와 이 공연절기가 또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예수님의 입장에서 하느님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이곳에 내려오신 성육신이지만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것은 성화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정말 이 미천하고 정말 하느님도 알 수가 없고 정말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하느님께 오심으로써, 저희들이 거룩하게 되는 그런 역사를 정말 우리 입장에서는 얘기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기도를 많이 하신 분들이 그 얘기하시는 거는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과정을 몇 단계로 얘기하죠. 그래서 처음에는 깨끗하게 하신다고 그러죠.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옛날에 나쁜 짓 한 거 나쁜 생각 한 거 이런 걸로 어지러워 걱정 근심 이런 걸로 어지러워져 있는 우리들의 생각을 하느님께서 하나하나 이렇게 만지셔서 좀 가라앉게 해주시면.
그 다음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비춰주신다고 그래요. 그래서 우리들 마음을 이렇게 착 비춰주시면 이것이 무엇이 진리였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고 이런 걸 알게되지요.
알게 되면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거룩하게 만드셔서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는 거룩한 사람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신다고 해서 이 성화를 마지막 단계로 하죠.
근데 그것이 어떤 단계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고 해요. 그래서 거꾸로 되는 경우도 있고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만 그냥 우리가 인식의 순서로는 정화시키시고 우리들을 밝은 빛으로 비춰주시고 우리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으로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들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들의 성화, 우리들의 미천하는 우리들을 당신의 뜻으로 거룩하게 하는 그런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 우리 서방교에서는 성화인데 정교에서는 또 좀 다르게 얘기해요. 정교에서는 신화라고 해요. 인간을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신다고 하였지요. 인간이 하느님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이 거룩하게, 그 하느님. 그 높은 곳으로 하느님의 뜻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주셨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굉장히 탁월한 통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궁금해가지고 뉴스를 봤어요. 유튜브를 봤더니 밤새도록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은박지 같은 거 이렇게 하고 거기서 새벽 3시인데 거기서 새고 있는 게 나왔어요. 길에서 막 거기서 은박지 덮고 자고 그래서 너무 또 미안하기도 하고. 다 보니까 어리고 그래서 아휴 정말 나는 여기서 편안하게 이렇게 자고 일어나는데 정말 저런 사람들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어떤 고등학생이 한 얘기가 생각났어요. 자기네 엄마는 이찌기고 태극기 부대고, 자기 증조부는 친일파여 일본 순사랑 같이 막 웃으면서 사실, 손짓고 그렇지만 나는 그래도 여기에서 나와서 우리나라의 밝은 내일을 위해서 힘을 합치고 싶다 그리고 이것을 감추고 싶지만 감추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면서 우리의 미래를 더 좋게 만들겠다 이렇게 얘기하는 걸 보면서 감탄했어요.
아 그래, 우리가 남자 여자로 갈리고 나이대로 갈리고 빈부로 갈리고 그렇지만 그런 것을 어느 순간에 다 뛰어넘어서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멋있는 힘이 우리들 속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거 굉장히 불교적인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다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서로 다 연관이 되어 있고 그래서 더 높은 그런 내 작은 나가 아니라 더 큰 나로 나아간다라는 생각을 하니까 멋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서의 진리는 모두 이러한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어, 다른 사람의 고통과 갈망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이지요. 오늘 읽은 말씀 구약에 말씀이 선포된 것도 사실은 노예생활의 그 어려움 속에서 그 반추로부터 나온 것이고 또 메시아를 기다렸던 그 갈망도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하는 그 어려움 가운데서 나온 것이지요. 또 그리스도가 오시는 걸 기다렸던 그 수많은 마리아나 그런 데 나온 것이고 그들의 그런 역사로부터 나온 것이지요.
오늘 우리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열망하는 그것도 옛날에 서울의 봄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통해서 본 우리가 저런 어두운 그런 것들을 다시 돌아가면 안 된다는 그 어두움에 대한 그런 성찰로부터 이 밝음과 한 단계 높은 것으로의 길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제 새해가 됐는데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면 정말 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런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고 힘들 것도 있어요. 그런데 옛날에 곤도마리에인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집안을 정리하면서 많이 버리라고 그러잖아요. 버릴 때 이렇게 버리지 말고 버리는 그 물건한테 고마웠다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 그러면서 버리라는 거예요.
어쩐지 그게 좀 어리석은 일인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래요. 버리는 것도 그냥 확 이렇게 버리지 않고 그렇게 버리려면 좀 뭔가 마음에 더 못 버리는데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 그러면서 버린다고 하는 그 마음이 더 잘 버릴 수 있고 내 마음을 또 버리는 나의 이런 마음을 달래주는 면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난 한 해를 우리가 돌아보면서, 또 여러 가지 안 좋은 일도 있고 그래서 그것을 또 버리려는 마음, 새로운 것을 바라는 마음도 있겠지요. 하지만 성경에 나온 많이 기다렸던 사람들처럼 지난 우리가 살아왔던 그 과거를 정말 감사하면서 그 소원에 우리의 모든 소중한 순간들과 소중한 희망들을 다시 잘 추려서 밝아오는 이 해에 우리가 맞이해야겠습니다.
이 하느님의 진리가 우리가 알 수가 없죠.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알기 쉽게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 진리는 무엇입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겁내지 말고 하느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다. 또 미천한 우리들을 그 하느님의 높은 뜻에 그 우주적이고 커다란 그 따뜻한 꿈속에 우리들을 동참시킨다고 하는 그런 막연하지만, 실낱같은 성육신의 희망을 일깨워주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희망으로 오늘 이 시간의 기도를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41 ¶ 해마다 과월절이 되면 예수의 부모는 명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는데 42 예수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명절의 기간이 다 끝나 집으로 돌아올 때에 어린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의 부모는 44 아들이 일행 중에 끼여 있으려니 하고 하룻길을 갔다. 그제야 생각이 나서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찾아보았으나 45 보이지 않으므로 줄곧 찾아 헤매면서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갔다. 46 사흘 만에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거기서 예수는 학자들과 한자리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는 중이었다. 47 그리고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지능과 대답하는 품에 경탄하고 있었다. 48 그의 부모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예수를 보고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49 그러자 예수는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50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52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
아이들이 길을 잃는다는 것은 아이 자신과 부모들에게 모두 충격적인 상황입니다. 제 친구 중에 하나가 어렸을 때 길을 잃어버렸던 이야기를 하는데요. 그러니까 어머니 아버지하고 손을 놓치고 길을 잃어버려서 이쪽에 있는 소도시에서 저쪽에 있는 소도시까지 울면서 걸어갔대요. 그 고속도로를 따라서. 그동안에 이제, 집에서 막 찾고 난리가 났었죠. 근데 아이들은 길을 잃어버리면 그냥 앞으로만 간다고 그러더라고요, 울면서요. 그래서 그렇게 먼 길을 밤새도록 이렇게 걸어갔었던 그 얘기를 하는데, 그 아이는 얼마나 놀랐으며 그 부모는 얼마나 놀랐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도 사실은 공항에서 제가 영국으로 출장하는 날인데 잠깐 이렇게 딴 데 보고 있는 한 1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애가 없어져서요. 그날 출장할 비행기는 떠야 되는데 애는 2층, 1층 다 뒤져도 없고. 그래서 출장을 취소할 때쯤 됐을 때 어디서 전화가 온 거예요. 얘도 비슷하게 울면서 앞으로만 가다가 다행히 옆에 있는 어떤 아저씨한테 핸드폰을 달라고 해서, 전화를 한 거예요. 그래서 찾았던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도 어렸을 때 오늘 성경말씀 보면, 그렇게 좀 부모가 길을 잃어버린 얘기가 나와요. 근데 이게 이제 유태인들은 어떻게 되어 있었냐면. 그 당시만 해도 명절날(유월절)이 되면 다, 우리가 명절에 고향을 찾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예루살렘에 모여서 예루살렘에서 같이 예배를 하고 거기서 순례를 하고 집으로 가게 되어 있었고요. 요즘에 가족이 그냥 다 핵가족인데 그 당시만 해도 큰 친척들이 같이 내려가니까 애들은 애들끼리 막 사촌들하고 같이 해가지고 내려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 어디엔가 있겠지 그러고 내려가다가 나중에 알게 된 거죠. 그래서 이 부모가 그 길을 거슬러서 올라오면서 그 인파가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거 계속 걱정하면서 이거 우리 애기 완전히, 지금 엄만한, 아빠 혹시 얼마나 지금 그러고 있을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그런 것을 한 게 마리아가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왜 우리를 애태우르냐. 널 찾느라고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이런 얘기가 그래서 나오는 얘기죠.
그런데 오늘 이 장면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많이 들었어요. 우리가 하느님께 충실하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일관성 있게 살아야겠다고 열심히 살아가는데 인생을 살다 보면 그 전제 그렇게 열심히 이쪽으로 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하느님이 원했던 방향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라는, 그런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유치한 예를 들면, 제가 사제로서 30년을 살고서 하느님 앞에 섰더니, 그래서 ‘하느님이 전 열심히 주님의 일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하면요. 그런데, 그런 비유가 있죠. ‘나는 네가 뭐 했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나오잖아요. 그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이 방향으로 한다고 했던 그것 자체도, 하느님께서 ‘그것도 아닐 수도 있어’ 라고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통해 보았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안전하게 잘 보살피고 양육하는 것이 최고의 의무이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 당신은 그보다는 ‘이스라엘이 갈 길과, 이 인류가 앞으로 어떻게 가야 될 것인가’를 거기에서 같이 의논하고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하시는 거죠. 이러한 이 괴리감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느낄 때가 많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우리들에게 오는 축복들도 너무나 우리가 기대하지도 못했던 큰 축복들이 우리들에게 정말 아무 값 없이 주어지는가 하면, 또 우리가 누렸던 그런 것들이 어느 순간에 또 위협을 받거나 사라지게 되거나 또한 이 세상을 떠나야 되는 그런 상황을 만났을 때 우리는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굉장히 마리아와 요셉처럼 큰 축복을 누리는 생활 속에서도, 질문과 곤경에 빠지게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 엄무광 선생님의 ‘향심기도 강연’ 테이프를 듣고 있는데, 계속 내려놓는 훈련을 시키더라고요. 그분은, 생각들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기도할 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자꾸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내려놓는 연습을 하라고 하는 데요. 그 이유는, 우리가 가장 중요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도, 하느님 앞에서 내려놓을 수 있고 상대화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우리가 항상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끊임없는 충실함으로 나아가되, 주님 앞에서 그 또한 내려놓으라고 했을 때는 기꺼이 내려 놓을 수 있는 지극한 충실함으로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될 것은 이 신실함과 같은 말이 끊임없는 사랑이라고 하는데요. 변함없는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 신실하신 하느님의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항상 마음 아파하시고 정말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는 주님의 신실하심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함께 모여서 예배를 준비하면서 조금 일찍 오신 분들과 나눈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난해가 너무 어려운 한 해였고 너무 위험한 것도 많은 한 해(제주항공 폭발 사고 등)였는데 앞으로 오는 해도 좀 걱정이 된다. 어떤 분이 그러셔서 우리가 좀 서로 그래도 우리 새로운 해를 희망으로 맞이하자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이런 뜻밖의 일들을 만나고 그렇지만 우리가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끊임없는 사랑, 신실하심, 하느님의 그런 자비하심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가야겠습니다.
우리 앞에 어떠한 기쁜 일과 슬픈 일과 어떤 소망과 또는 절망이 닥치더라도 항상 그러한 신실함을 귀히하고 꾸준히 살아가는 우리 한해가 지난 2024년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 동터움을 느끼고 그런 새해를 맞이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39 ¶ 며칠 뒤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걸음을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를 찾아가서 40 즈가리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을 드렸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에 그의 뱃속에 든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 42 큰소리로 외쳤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43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44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45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46 ¶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47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 이 마음 설렙니다. 48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 주님은 거룩하신 분, 50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51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53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54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55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56 ¶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에서 석 달 가량 함께 지내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안녕하세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이콘 중에 하나가 성모 왕문 – ‘성모께서 엘리자벳을 방문하시다’라는 이콘이에요. 나이 많은 여자 한 분과 나이 젊은, 파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가 서로 손을 맞잡는 그 그림이 저는 참 좋더라고요. 당시에 마리아로서는 예수님을 잉태하는 것 자체가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가 없는 그런 기적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이게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을 거예요. 이미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에게 얘기할 때, ‘은총이 가득하신 이여’ 이런 얘기하잖아요. 그게 사실은 그 당시에 굉장히 귀족층이라든가 왕족 이런 사람들한테 붙이는 칭호래요. 그런데 그냥 갈릴레아 뭐 이런 데 살고 있는 그냥 시골에 있는 젊은 아가씨한테 천사가 나타나서, 마치 저기 고위층에게 얘기하듯이 은혜를 가득히 받으신 이어 이렇게 얘기하니까, 마리아가 그때 굉장히 깜짝 놀라면서 그 이야기를 들었죠.
하지만 인간은, 천사의 계시도 필요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들의 인정과 공감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엘리자벳도 그 당시에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아이를 갖게 된 가졌잖아요. 그래서 그 얘기를 듣고 나하고 비슷한 사람이니까 나에게 뭔가 위로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있겠다. 그래서 찾아갔었을 것 같아요. 산동네에 살고 있는 엘리자벳에게 찾아가서 여기 보면 세 달 정도 있었다고 해요. 그 당시에 사회에 그걸로 봐서는 제 약혼한 상태인데, 일찍 임신한 것이 금기시되고 그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아기가 낳을 때까지 거기에 오랫동안 머물렀죠.
그렇게, 우리 인간은 살면서 정말 어떤 그런 공감과 옆에 있는 사람들이 ‘괜찮아’라고 이야기 해 주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참 그런 기억이 어렸을 때 있었나 생각을 해보니까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정말 그런 분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전학을 가면서 굉장히 많이 위축이 돼 있었고 그 당시 학급이 60명 70명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학생들 한 명 한 명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기가 어렵고, 저는 주로 야단을 많이 맞고 살았는데 5학년 때 선생님은, 잘한 것 같지도 않은데, ‘야 너 참 잘했다’ 이렇게 몇 번 해주셨어요. 그런데 그게 저한테는, ‘그래도 우리가 선생님이 좋아하는구나’ 이런 느낌을 가져서 그때 좀 자신감도 생기고 학교에 가는 것도 더 좋아졌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기억에 나는 걸로는 몇 번 되지 않지만 그 짧은 그런 몇 마리가 힘을 주었어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남의 짐을 져주기는 정말 어렵고 자기의 그런 짐을 지고 가기도 벅차지만, 그 중에 조그만 무언가를, 다른 사람에게 한 5천 원어치라도 던져 줄 수 있으면,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큰 삶의 운동력이 되기도 하고 새로운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계시만 가지고서는 부족한 옆에 있는 누군가가 사람이 격려해지고 위로해주는 것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입니다.
대림절기도 다 지나가고 이제 자주색 영대를 하는 날도 이제 다 끝나고, 대림초 네 개도 다 이렇게 켜지니까, 아 정말 한 해가 저무는 감회가 새롭습니다. 요즘 집에 있는 사진첩들을 다 청소하면서 봤더니 옛날에 찍어놓은 사진들이 있어요. 근데 20년 전 사진을 보니까 ‘아 이런 때도 있었네’ 하는 생각이 들고, ‘아 그 이때도 살아 있었구나’, 그래서 굉장히 낯설게 옛날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요즘에 ‘안리타’라고 하는 분의 시집을 지금 두 권째 읽고 있는데 거기에 ‘살아진다 사라진다’라고 하는 시집입니다. 올해를 마감하는 저의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이 시인이 살다 보니까 사는 맛이 없을 때도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살고 싶지 않다’ 그래도, 살아지는 거예요. 그리고 ‘살고 싶다’ 그런 때도 똑같이 살아지는 거죠. 그런데 또 한편, ‘떠나가지 말라고 해도 떠나가고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그 계절 속에서 내가 이렇게 나의 하루하루가 사라지고’, 그렇게 저의 올해 한 해가 사라지는 것처럼, 시인의 인생도 그렇게 사라져가고 있죠. 그래서 우리가 원하든 안 하든 우리가 살아가고 있고 사라지고 있는 이 순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네요. 마지막 구절만, 세 문장이니까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네, 살고 싶지 않아도 살아지고 살고 싶은 날에도 살고 있는 이런 알 수 없는 생의 한가운데를 올해 서성입니다. 단지 우리 잘 살아지기로 해요. 그리고 우리 잘 사라지기로 해요.
제가 희년교회에 온 지 조금 시간이 지나서, 이제 서로 조금 편해질만큼 시간이 흘렀네요. 이곳에 와서 저희가 나눈 것은 굉장히 적지요. 주일날 1시간, 2시간 나눈 거지만 그것이 서로들에게 힘이 될 때도 있고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라지고 있는’ 소중한 시간, 우리가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살아지고 있는 이 시간에, 조그만한 그런 격려와 힘이 서로에게 될 수 있는 그런 공동체로 2025년을 맞을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성모가 엘리자벳을 만난 그 기쁨으로, 우리 서로에게 격려가 되는 이 기도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번에는 감리교 선교신학자 필립 미도우즈Philip R. Meadows의 ‘디지털 문화 속에서의 선교와 훈련’Mission and Discipleship in a Digital Culture에 대하여 소개하려 합니다. 미도우즈는 ‘전도와 제자삼기’, ‘선교적 교회론과 교회개척’, ‘오늘의 문화 속에서 선교하기’, ‘웨슬리 신학과 영성’의 전문가이며, 디지털 문화 속에서의 선교 참여와 서구의 세속화 문제 등에 대한 많은 학술 논문을 발표했는데 최근의 발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웨슬리 DNA의 훈련: 21세기 교회를 위한 훈련의 새로운 표현들 The Wesleyan DNA of Discipleship : Fresh Expressions of Discipleship for the 21st Century Church (Grove, 2013)
세례를 기억하라: 웨슬리 영성의 훈련과 선교 Remembering Our Baptism : Discipleship and Mission in the Wesleyan Spirit (Discipleship Resources, 2017)
이 논문에서 미도우즈가 분류한 디지털 문화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세 가지 경향성은 현대 코비드19로 인한 언텍트 사회와 목회에 적용할만한 틀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디지털 변혁의 파장을 ‘수렴의 관점’perspective of convergence에서 선교와 훈련의 방향으로 재정립할 것을 이 논문에서 그는 제안합니다.
수렴의 관점
저자는 새로 부상하는 디지털 문화가 낡은 미디어(또는 디지털 이전의 방식)을 완전히 대치하게 될 것이라는 ‘디지털 혁명’의 관점에 그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 것과 낡은 것, 디지털 미디어와 전통적 미디어가 전례 없는 복합적인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수렴(융합)할 것이라는 젠킨스Jenkins의 의견에 그는 동의합니다. (수렴의 문화: 새 미디어와 낡은 미디어가 부딛치는 곳Convergence Culture: Where Old and New Media Collide)
그래프를 보면 x축 위에서 접근하는 선과 아래에서 접근하는 선이 점점 0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도우즈에 의하면 ‘수렴의 원리’principle of convergence란 ‘인간의 삶(관계들와 공동체)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다양한 전통들과 관행들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미디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방식과 디지털 방식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일상생활)로 점점 가까워져 융합된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이 일상생활이란,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 일터에서의 협업, 여가시간의 사용, 쇼핑, 세금 납부, 정책 결정 참여 등과 같은 방대한 영역, 방식의 개편이 이루어지는 모든 분야들을 의미합니다. 이 논문의 목적은 1)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디지털 문화’가 새로운 시대의 약속인지 함정에 불과한지를 살펴 보고, 2) 선교와 훈련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한 광범한 (디지털 문화의) 의미들(암시들)을 탐구해 보는 데에 두고 있습니다.
데이빗 벨의 디지털 문화론
저자는 데이빗 벨David Bell의 ‘사이버문화 개론’An Introduction to Cybercultures에서 소개한 물리적, 상징적, 체험적 설명을 소개하여 ‘디지털 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을 잡습니다.
1 물리적 접근
디지털 문화에 대한 물리적 설명은 컴퓨터와 디지털 장비와 인터넷의 기원과 발전과 활용으로 오늘의 일상 생활은 점점 더 디지털 미디어의 ‘가상 영역’virtual realm에 잠겨들고 있다고 합니다. 이 접근방식들은 주로 도구들, 양식들, 기능들에 집중하며, 모든 곳을 둘러싸고 있는 ‘유비쿼터스 컴퓨팅’ubiquitous computing 환경, 가정과 일터와 노동과 여가의 상호연결interconnecting의 패턴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디지털 네트웍들이 현대사회의 주요한 조직 모드가 되고 있다. (판 디에크Van Dijk의 ‘네트웍 사회: 새 미디어의 사회적 측면들’Network Society: Social Aspects of New Media).
소셜 미디어가 전통적인 사회관계들을 대체하는 현상.
아바타avatar가 가상 공간에서 취직도 하고, 땅도 사고, 집도 짓고, 교회도 가고, 결혼도 하고, 정착도 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관한 (팀 게스트Tim Guest의 ‘제2의 인생: 가상 세계로의 여행'(Second Lives: A Journey Through Virtual Worlds).
수렴의 관점에서 보면 ‘디지털 공간에 거주’ 는 가상 네트워크가 대화식으로 일상 생활의 흐름에 접해 있는 생활에 몰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포스트 데스크탑’ 세계에서 가상공간cyberspace는 ‘저 밖에 있는’ 비현실적인 영역이라기 보다는, 광범한 정보 교환과 사회 관계들을 위하여 디지털 장비들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일상 생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2 상징적 접근
디지털 문화에 대한 상징적 설명은 소설과 예술과 영화를 통하여, 우리와 기술의 관계를 상상하고, 미래에 대한 우리의 희망과 두려움에 관한 설명을 하는데 그 유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트루먼 쇼우Truman Show와 매트릭스Matrix에 나오는 것처럼, 기술과 사회가 융합되어, 배후의 사회정치적 세력들이 디지털 미디어를 사용하여 현체제status quo를 유지하도록 우리를 길들인다는 이야기들.
우주 여행Star Trek과 이백년의 사람Bicentennial Man에 나오는 것 같이, 기술과 몸이 융합되어, 디지털 임플란트와 로봇 보철, 핸드헬드 컴퓨터와 블루투스 이어폰, 유전공학, 노노 기술, 로봇 공학의 개발을 통해 인간 유기체에 가까워진 기술, 기계와 인간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
트론Tron과 잔디깎는 사람Lawnmower Man에 나오는 것 같이, 기술과 생각이 융합되어, 우리의 의식을 업로드하거나 디지털 기술로 낚아채어, 우리 생각(마음)의 소프트웨어를 우리 육체의 ‘웻웨어'(wetware, 기계를 뜻하는 하드웨어에 비하여 우리 몸을 가리킴)로부터 분리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들.
이런 상징적 질문들을 통하여 디지털화된 포스트 모던 사람들은, 기술적 숙달과 조작의 환상을 넘어서는 진짜 자아, 진짜 관계, 진짜 공동체 같은 것이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3 체험적 접근
디지털문화에 대한 체험적 설명은 ‘원격 대면’telepresent로 요약할 수 있는데, 시간과 공간으로 떨어져 있는 어딘가에 또는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느낌을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얼굴을 대면하는 만남의 가치를 이러한 ‘원격 대면’의 체험이 재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합니다. 아무리 원격 대면의 기술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맛 보고, 냄새 맡고, 만지는 구체적인embodied 친구와의 대면을 대치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매체가 다른 사람들과 더 연결되어 ‘항상 켜져 있는’always on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부재(외로움absence)의 감정을 극복하게 해 주고, 시공의 한계들을 넘어 풍부한 체험들을 나눌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나 이 또한 혼자 있기를 갈망하는 사람들과, 텍스트, 트윗, 현재상태 업데이트등의 스트리밍 문화에 떨어지지 않고 주의글 기울이려는 사람들 사이의 체험의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항상 켜져 있음’의 중독과, 얼굴을 대면하는 심도 있는 만남의 대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게 됩니다.
위의 세 가지 이야기들에 대한 미도우즈의 요약은 이와 같습니다.
요약하면, 디지털 문화는 일상 생활에 가상적 차원을 추가합니다.
한 편으로 디지털 기술은 우리의 구체적(현실의) 관계들을 여러 측면에서 향상시키고 확장시켜 주지만, 우리의 삶을 여러 다른 영역들로 분리시켜 구획화compartmentalize 시켜 버리거나, 가상의 생활 그 자체를 목적(주객전도)으로 삼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 디지털 매체의 분리하는disembodying(구체적 형태로부터 자유롭게하는) 효과는 우리의 가상적인 삶에 엄청난 자유와 유연성을 가져다 주지만, 설득력 있는 ‘시뮬레이션’ 뒤에 중대한 손실들을 은닉하고, 온전한 인간 관계들에 덜 정착하도록 유혹할 수 있습니다.
이 ‘구획화’와 ‘분리’의 긴장들은, 성육신하신 구세주의 모본을, 온 삶으로, 선교하는 제자mission-shaped disciples로서 따르려는 이들에게 심각한 도전을 제기합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려는 이들에 대한 위와 같은 디지털 문화의 도전에 대응하는 방식을 분류하는 데에 미도우즈는 프랜스키(Marc Prensky, 디지털 원주민과 디지털 이주민Digital Natives, Digital Natives)의 디지털 원주민과 디지털 이주민에 대한 문화적 연구에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구도 ‘타고나면서부터 디지털’born digital일 수 없고, 태어나면서부터 토착화된inculturated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선교학적으로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에 대한 입장을, 디지털 외계인digital alien, 디지털 선구자digital pioneer,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미도우즈에게 독특한 것은 이 세 가지 경향성이 각각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한 사람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는 상호 모순되면서도 상존하는 양가 감정 또는 태도로 본다는 것입니다.
1 디지털 외계인
이들은 무비판적인 기술의 도입에 대해, 성서적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깎아내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저항합니다. ‘기술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주요한 이야기들은 성서에 관한 것이어야 하며, 우리는 매우 ‘전통적인’, 디지털 이전pre-digital 뿐 아니라 근대 이전pre-modern한 생활 양식에 자리잡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관계하시는 매개체로서, 주변 백성들로부터 구별하여 부른 거룩한 백성의 형성을 통해서, ‘몸으로’in the flesh 하느님 현존의 실재reality와 아름다움을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이들에게 성서적 교회란 함께 직접 빵을 떼고 서로 발을 씻겨 주는, 더불어 사는 것을 체현하는 성육신은, 가상의 형태로 온전히 표현될 수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여기서 미도우즈는 역설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물리적으로 모인다는 것이 그렇다면 서로가 진정 현존really present(서로를 진정으로 느끼는)을 보증하느냐는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같은 곳에 머문다고 해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얼굴과 얼굴을 직접 대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삶을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의 영적 뿌리는 실제 영역이나 가상 영역 모두에 뻗어 있어, 하느님의 선교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을 약화시킵니다.
2 디지털 파이어니어
이들은 전도와 훈련과 공동체를 탐험(실험)할 수 있는 디지털 공간의 잠재력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스도인 삶의 ‘전통적’ 표현들은 디지털 기술들과 상호작용에 매개될 수 있다고 봅니다. 성서적 그리스도교가 현실과 가상의 양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봅니다. 디지털 외계인이 디지털 미디어의 힘이 우리의 제자도를 잘못구성mis-shape한다고 저항한다면, 디지털 파이어니어들은 디지털 미디어의 힘을 장악하여 우리의 사역을 재구성re-shaping하는 데에 사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가상 교회의 다양한 실험들을 소개합니다.
여기서도 저자는 디지털 외계인의 입장에서 파이어니어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아바타가 된다는 것은 성육신한다는 것과 같지 않으며, 복음은 전송하기 편한 비트와 바이트의 정보로 디지털화 할 수 없다는 점, 가상의 복음은 편하고 안전하고 즉각 접할 수 있는 상품commodity으로 왜곡되어, 포스트모던 개인주의의 갈망들을 살찌우며, 영성을 내적 종교 체험의 추구로 축소시키고, 사목을 개인의 영적 여정을 위한 가상의 사역chaplaincy로 바꾸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놀라운 점은 이런 가상 교회에 대한 비판은 전통적 교회에 거울처럼 반사시켜, 제자도 전반in general(전통적 교회를 포함하여) 소비주의와 개인주의는 오래 앓아 온 역병과 같은 문제였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가상의 교회가 실재 교회와 반목하는 것이 아니고, 가상의 교회가 전통적 교회를 대체하는 것도 아니고, 서로 보완하면서 그리스도교 제자도와 공동체의 표현들을 함께 풍성하게 해 줍니다.
3 디지털 원주민
디지털 외계인이 실재embodied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디지털 파이어니어가 가상virtual 공동체의 잠재력을 강조한다면, 디지털 원주민은 양자(실재와 가상)를 통해 표현되는 영적 우정의 네트웍에 소속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 합니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몇 권의 참고 도서를 권해 주고 있습니다.
아담 토머스Adam Thomas, 디지털 제자: 가상 세계 속의 진짜 그리스도교Digital Disciple: Real Christianinty in a Virtual World.
엘리자벳 드레셔Elizabeth Drescher,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트윗하세요: 디지털 변혁 가운데 교회를 실천하기Tweet if You Love Jesus: Practicing Church in the Digital Reformation.
제시 라이스Jesse Rice, 페북 교회: 초연결성이 어떻게 공동체를 재구성하고 있나How the Hyperconnected are Redefining Community.
렉스 밀러Rex Miller, 새천년 매트릭스: 교회의 과거를 되찾고 미래를 다시 구성하기The Milenium Matrix: Reclaiming the Past, Reframing the Future of the Church.
이들은 가상 교회들이 전통적 표현들을 단지 흉내내기만(시뮬레이션simulate) 한다면 그런 곳에 참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들이 관심있는 것은 진정성authenticity입니다. 디지털 원주민들은, 집에서든, 특별히 마련된 성소에서든, 스타벅스와 같은 만남의 장소든, 페북과 같은 가상의 네트웍이든, 그리스도인들이 친교(상통)을 위하여 모일 때마다 어떻게 교회가 형성되어갔는지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연결적인(하는) 공간들’connective spaces로서, 함께 흐를 수 있고, 진짜real 사람들이 하느님과 그리고 서로와 변혁적인transforming 관계들을 형성하고 지속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디지털 외계인들이 매체에 저항하고, 디지털 파이어니어들이 메체를 재형성한다면, 디지털 원주민의 기본 입장은 매체를 ‘리믹스’remix, 다시 섞어 재창조한다는 것입니다. 이 리믹스된 관계들에는 실재와 가상의 삶 사이의 구분이 필요가 없습니다. 육신flesh이 가상적 관계들을 통해 원격 대면telepresence이 되는가 하면, 원격 대면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모임들을 통하여 육신이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택하신 매체가 디지털 문화를 위하여 리믹스된다면, 디지털 외계인들은 진짜 상실들이 확신을 주는 시뮬레이션 뒤에 감춰어지고, 일상 생활이 가상 이미지 속으로 재형성되고 말 위험에 대해 지적합니다. 이것이 실재 현실이 방치되는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실재 사람들이 육신 안에서 초실재hyper-reality의 습관을 을번시킴에 따라, 깊이와 진정성의 상실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디지털 문화의 위험은 우리가 덜 인격적으로personal 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 가운데 항구적으로 ‘몸을 벗어난 체험’을 하며 살아가는 초인격hyperpersonal이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즉 (직접 접하는) 이웃들을 위한 얼굴과 ‘항상 켜져 있는’always on(가상의) 관계를 위한 이중적인 얼굴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성으로 서핑을 하면서, 계속 부분적으로만 주의를 기울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온전히 대면하지 않을 위혐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덜 관계를 맺는 위험이 아니라, 초친밀함hyperintimate, 즉 계속 (때로는 분별 없이) 공중이 소비할 개인적인 메시지들을 과하게 나눈다는oversharing 것입니다.
디지털 문화에 참여하기
저자 미도우즈는 디지털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사는 것에 관하여 영성, 훈련(제자화), 친교(상통), 전도의 영역에서 분석을 계속합니다. 그의 수렴적 관점에서 보면, 삶의 가상적 차원은, 온전히 현실화된(실재의) 제자도를 대체하기보다는, 증대시키고 확장합니다. 하지만 가상적 생활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으려는 열망은, 소위 ‘진짜 교회’ 안에 내재하는 영적 질병의 증상으로 보입니다. 공허한 예배, 창백한 친교, 엷은 실천들, 진정한 생활의 것들과 단절된 모든 것들은, 영양부족인 영혼들과 영적 의기소침함을 초래합니다.
저자는 디지털 문화 속에서 전개하는 선교의 미래는, 온라인 세계 속에 가상 교회를 개척하는 데에도, 전통적인 교회를 기술적으로 더 향상시키는 데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지역 교회가 ‘훈련을 하지 않는다면’not making disciples, 기술을 포용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정한 제자도의 추구’가 없다면, 가상 영역에 진짜 증언도, 가상 영역의 유익을 분별하는 것도, 위험을 감수하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저자는 영성과 훈련과 친교와 전도의 영역에서 이제 구체적인 분석을 시작하지만, 저의 요약은 여기에서 멈추려 합니다. 리뷰의 글로 시작했는데 자꾸 욕심이 나서 세세한 요약을 계속 하게 되었습니다. 독자가 이 논문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 리뷰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더 자세한 것은 잠시 여러분들께 맡겨 드리고 싶습니다. 이 논문에는 요약이 담지 못한 생생한 개념정의, 분석, 묘사들과 무엇보다도 풍부한 자료 소개가 있습니다.
코비드19로 인하여 디지털 외계인과 파이어니어의 토론과 논쟁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이 때에, 미도우즈의 분석과 분류는 전반을 볼 수 있는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점점 떠오르고 있는 디지털 원주민과 이 문화에 더 익숙해지는 사람들과 경험들이 어떤 특징과 약점을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도 도움이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대면 예배를 계속하겠다’는 극단적인 표현과 또 그 반대의 입장들에 대하여 진영이 나뉘는 것 같은 한국의 현실에서, 외계인과 파이어니어와 원주민의 경향이 모두의 마음 가운데 동시에 존재한다는 그의 통찰은, 우리가 어떤 입장을 악마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함께 접근해 가야 한다는 섬세함을 가다듬게 해 줍니다. 물론 이런 논쟁의 가치와 아픈 과정의 필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되겠지만,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양심을 한 번 더 기다려 보게 해 줍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디지털 문화의 쟁점을 외부가 아닌, 진정한 훈련,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제자화에 두고 있는 점입니다. 상황이 어떻게 변하던 이를 더 진정한 교회로 거듭나는 기회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디지털 문화의 격변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참여하려면 어떤 영성, 훈련, 친교, 전도를 하여야 할지 더 깊게 생각하고, 저자의 글을 통하여 함께 더 깊어지기를 바라며 이 소개의 글을 마치려 합니다. +
이번 책가방 축복식 선물은 도토리예요. 동글동글하고 토실토실한 도토리가 참 예쁘지요. 옆에 다람쥐가 같이 있으면 더 좋겠지요. 올해는 대한성공회가 한국에 온 지 130년이 되었어요. 그 옛날에 성공회 교회를 시작한 사람들은 도토리 나무를 참 좋아했던 것 같아요. 1911년 주교 서품식에 영국에서 보낸 선물을 보면 대한성공회 마크와 도토리 가지가 함께 새겨져 있어요. 대한성공회 마크를 자세히 보면 십자가 주변에 도토리 나무잎 무늬로 장식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지요.
도토리 나무가 이 문장을 디자인 한 분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는지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당시 산 위에 올라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도토리 나무, 상수리 나무에서 한국의 자연, 한국의 산과 강에 대한 느낌을 받은 것 같아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 속에서 금과 은으로 장식할 대한성공회의 비전을 떠올린 사람들이 멋있게 느껴지네요.
올해 서울교구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좋은 마음 좋은 행동으로 빛나는 생활을 하기로 하였어요. 그런데 크고 환한 빛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결심과 희망과 실천으로 시작되는 것이겠지요. 도토리 나무가 햇빛을 받아 도토리 한 알 한 알을 열매 맺으면, 귀여운 다람쥐들은 추운 겨울에도 오손도손 마주앉아 도토리를 먹으며 힘을 내겠지요.
여러분도 이 선물을 보면서 그런 마음을 되새겼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눈여겨 보지 않는 평범한 하루 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옆에 있는 사람들 속에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면 좋겠어요. 도토리처럼 작고, 단단하고, 알찬 여러분의 빛을 기대합니다.
지난 2019년 5월 25일과 26일 새문안교회에서 사라 코클리Sarah Coakley가 주었던 메시지의 여운은 지금도 잦을 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몇 가지 열쇄말을 이해해야 한다.
1. 기도와 갈망
한국어 번역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이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갈망desire을 ‘욕망’으로 번역한 것과, 둘째는 수덕생활asceticism을 ‘금욕주의’로 옮긴 것이다. 사실 욕망이라는 번역이 지닌 장점도 있는데, 기도가 인간들의 욕구와 욕망을 배제시킨 추상적인 무엇이 아니라, 온갖 바램과 희망과 허영이 뒤섞여 응어리진 마음을 다 가지고 하느님을 대면하는 것이라는 것을 드러낸 점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욕구와 욕망이라는 용어로 담아 낼 수 없는 광대한 영역이 있다. 코클리는 기도를 만유 또는 온 세계를 향한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과 기도라는 스케일에서 이해를 하고 있다. 이것이 기도의 본 줄기라고 한다면 ‘성령의 욕망’ 또는 ‘성령의 욕구’라는 표현 보다는 ‘성령의 갈망’ 또는 ‘성령의 갈급함’이라는 표현이 더 가까운 것 같다.
르고 마음 속에 새로운 스파크를 일으킨다. 그의 발표는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 묻혀 있는 기도 생활의 광맥을 보여 주었지만, 그만큼 생소한 용어들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이 낯선 개념들이야말로 기도 생활의 영역을 넓혀 주는 뜻밖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자 사라 코클리Sarah Coakley 박사가 언더우드 국제 심포지움의 강사로 방한하여, 새문안교회에서 2019년 5월 25일과 26일 이틀에 걸쳐 세 차례의 강연을 진행하였다. 그는 ‘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도록 한국 교회를 촉구하였다. 그에 의하면 기도란 ‘모든 피조물을 위한 성령의 말할 수 없는 깊은 탄식과 간구에 참여하는 것이며, 자그마한 파편인 개개인의 갈망이 하느님의 갈망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강연 주제는 “기도, 욕망, 성: 오늘을 위한 삼위일체론의 재해석”인데, 그것은 크게 3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기도, 성, 욕망의 상호관계
삼위일체 교리의 원천인 기도
‘고전삼위일체신앙과 현대’의 기도, 성, 욕망에 대하여
이 강연을 잘 이해하려면 욕망(갈망), 성, 금욕주의(수덕생활)와 같은 용어를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1. 욕망desire
욕망desire: 고전 신학에서는 욕구needs와 갈망desire를 구분하기도 하였는데, 욕구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세상에서 채워질 수 있는 것이라면, 갈망은 하느님만이 채우실 수 있고 이 세상에서는 채워질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코클리는 기도의 원동력이 갈망이라고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모든 바램과 목마름이 결국에는 영원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큰 바램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개인의 욕구와 신적인 갈망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은 샘이다. 그렇기에 욕망이라는 번역도 맞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용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코클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걸러지지 않은 욕망을 하느님 앞에 가져와 하느님 의지에 맡겨 드림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검증test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자리 찾기’modulization라는 표현도 사용하였다. 깨어진 파편에 불과한 욕망이, 만유를 위한 성령의 갈망을 만나 자리를 찾게 되는 과정이 기도라는 것이다.
2. 성gender
코클리는 성에 대하여 ‘gender’와 ‘sex’라는 두 단어를 병기하였지만, 이 강의에서 이 두 용어에 대해서 특별히 논한 바는 없다. 나는 여기에서 ‘성’은 사실상 인간의 몸body이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마음soul이라고 하거나, 인간의 온갖 욕구와 갈망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갈망이 ‘영’spirit에 관한 것이라면, 욕구와 갈망이 섞여 있는 인간soul은 여러가지가 섞여 있는 구체적인 존재이다. 성육신은 영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의 몸과 마음과 성이라는 구체성 속으로 임하신 것이다. 기도 가운데 몸을 지닌 사람들의 갈망이 하느님의 갈망으로 통합되어 간다. 기도를 주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갈망이다. 인간의 몸, 마음, 성, 욕구에는 하느님의 뜻과 그에 반하는 것, 중립적인 것 등이 섞여 있는데, 우리는 그 모든 욕망을 지니고 하느님 앞에 나와 그것을 그분께 개방해 드림으로써, 하느님의 손길 속에 하느님의 갈망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렇기에 코클리는 기도에서 ‘갈망’이 ‘성’보다 주요한 측면을 이룬다고 하는 것이다.
금욕주의asceticism: 이 용어가 ‘훈련’이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하기에, 수덕생활, 수덕주의, 영신수련 등으로 옮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는 시민들이 전투에 나갈 수 있도록 신체 단련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수덕asceticism이란 몸을 강인하게 훈련하듯이, 영적인 단련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신자가 되기 쉬워지고, 박해 시기의 열심과 헌신이 약해지면서, 사막 등에서 기도 생활에 전념하는 공동체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영적 열심과 훈련을 뜻하는 수덕생활이 수도원을 연상시키게 됩니다. 코클리 강연의 결론이 ‘새로운 수덕주의’a new asceticism of desire인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용어를 금욕주의라고 번역하는 데에서 오는 오해는, 기도가 인간의 모든 욕구와 갈망을 포괄하는 열정인데 그것을 배제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점과,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더 깊이 머무려는 갈망을 외형적인 금욕과 자기 공로로 퇴행하는 형식주의로 오해하게 할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모든 갈망을 가지고 나오지만 하느님 뜻에 내려 놓는다’는 표현은 향심기도 등을 실천해 본 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구체적인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는 심상이 떠오르기 어려운 표현이리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할수록 명료해지기 보다는 어둠을 지나간다’는 등의 교부들의 기록들도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개신교의 유서 깊은 교회인 새문안 교회에서 ‘갈망의 새로운 수덕생활’을 접하게 된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간 한국의 성공회에서 많은 분들이 지켜 오고 일구어 온 영적 유산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래 전 영국의 가난한 동네에서 일하는 라로쉬 공동체에 방문했다가 ‘서번츠’Servants 소속의 활동가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받았던 소개 리플렛을 책꽂이에서 발견하여 옮겨 봅니다. 더 자세하고 정확한 소개를 원하시는 분들은 servantsasis.org 에서 영어 원문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서번츠 – 도시에서 그리스도교 정신을 실천하는 공동체’의 소중한 정신을 알리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그 리플렛의 내용을 그대로 번역하여 올립니다.
지난 세기 동안, 세계 모든 곳에서, 기록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라 도시에 피난처를 찾아 왔습니다. 이제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피난처를 찾기 보다는, 불행을 겪고 있습니다.
유엔의 집계로는, 세계의 빈민가들에 밀집해 사는 사람들의 인구는 이제 10억입니다. 이들은 매일 지저분함과 궁핍, 불의, 착취, 보건 위생 서비스의 결여, 매춘, 에이즈 등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인가요?
섬기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국제적 네트웍으로서, 아시아와 서방의 빈민가에서 살며 일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희망과 정의를 가져오려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사역의 5 원칙들
성육신 우리는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 그들로부터 배우며, 진실한 관계를 세워가며, 그들의 생활과 투쟁에 참여하며,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그들의 맥락 안에서 예수의 사랑이 최선으로 드러날 수 있는 방식을 실행해 나간다.
단순성 우리는, 내적 외적 단순성의 생활방식에 투신하여, 가난에 처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한, 풍족하게 살 우리의 ‘권리’들을 내려 놓는다. 우리는 자아에 사로잡힌 세상 가운데 설득력이 있으면서도 예언적인 목소리가 되기를 갈망한다.
공동체 우리가 들어 간 지역공동체들에 투신할 때에,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돌봄과 공동체의 모델이 되는, 지지하는 팀을 이루어 함께 일할 열정을 지닌다. 우리는 사람들을 ‘위하여’for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with 일한다.
섬김 우리는, 겸손히 ‘섬김을 받기 보다는 섬기러’ 오신 그 분을 따라, 참된 리더십의 유일한 길을 실천한다. 우리는, 외부의 자원들과 전문성으로 압도하기보다는, 가난한 이들의 손에 통제력을 넘김으로써 ‘권한 주기’empower를 추구한다. 우리는 예수와 가난한 이들의 삶 안에 성실하게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다.
온전함 우리는, ‘만물을 구속하시려’, 부자나 빈자나 삶의 온전함을 회복시키려 일하시는 한 분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일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선포하고, 기도를 통해 모든 것을 하느님께 아뢴다. 우리는 예수께서 말과 행동과 권능으로 선포하신 복된 소식이 실현되기를 원한다.
공동체의 5 가치들
은혜 우리의 모든 행동과 됨됨이는, 하느님의 자애롭고 무조건적인 사랑, 은총, 우리를 향한 관대하심에 근거하여 지속하고 있다. 이 풍성한 은혜가 우리를 불건강한 다툼과 경쟁과 우리들에 대한 책망과 타인에 대한 판단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경축 예배 가운데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축제를 인도함에 있어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모든 이정표(단계들)과 성취들을 나타내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잔치를 열 이유들을 찾는다. 우리는 우리가 관대한 사람으로 알려지기를 원하며, 우리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다루는 사람들이 되기를 거부한다.
아름다움 우리의 삶과, 가정과, 공동체들과, 세상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창조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의 영혼을 되살린다. 특히, 우리들과 서로 안에 내재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경축하라는 하느님의 소명에 기꺼이 순종한다.
창조성 우리의 오감과 상상력과 생각과 몸이, 하느님께서 주신 창조의 잠재력을 성취하도록 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 글쓰기와 이야기하기, 시 짓기, 그림, 다양한 예술로 우리가 창조할 때, 그것이 우리 마음에 유익하(며 하느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쉼 하느님께서는 일과 쉼, 주말과 휴일의 규칙적인 순환 속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쉬면서 생기를 얻도록, 잠잠히 하느님과의 관계와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깊게 하도록, 부르시는 하느님의 명령에 우리는 순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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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8일부터 6월 2일까지 ‘동아시아 화해를 위한 그리스도인 5차 연례 포럼’이 일본 교토의 도사샤 대학과 피정센터에서 열렸다. 이 포럼의 기조 강연을 한 사람은 미국 듀크 대학의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즈Stanley Howerwas였다. 5월 29일(화) 오후 1시 30분에 시작한 이 강의에는 한국, 일본, 중국, 미국, 홍콩, 대만 등에서 온 포럼 참가자들뿐 아니라, 많은 일본인 신자들이 참석하였다.
스텐리 강연의 요지
강연 제목은 ‘부상하는 민족주의와 그리스도인들의 책임 – 아시아의 교회: 바르트주의자의 묵상’이었다. 강연의 내용은 ‘민족주의와 기독교’, 바르트가 말한 ‘정직한 무지’ 소개, 그리고 대안으로서 ‘제도화와 일상’이라는 세 주제로 나누어져 있었다.
1. 민족주의와 기독교
하아어즈는 서두에서 서구 기독교왕국Western Christendom을 언급하는데, 다양한 사람들과 관습들을 하나의 틀로 아우르려는 기독교왕국 전략이란 ‘정부나 법의 권위 아래 교회를 강제로 하나되게 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시아에 왔던 선교들은 기독교왕국의 교회 출신들이었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기독교와 민족주의적 뿌리가 분리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시아 교회도 그들에게서 기독교왕국들의 잘못을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옥스퍼드 사전을 보면 민족주의nationalism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소개되어 있다. 첫째는 ‘외부 세력의 영향과 건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주권을 행사하려은 바램’이라는 뜻과, 둘째는 ‘자신의 나라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 탁월하다고 여기는 감정’이라는 뜻이 있는데, 하우어즈의 용법은 둘째의 것에 해당한다. ‘진정한 (백인) 기독교의 미국을 재건하자’는 구호와 같은 배타적인 국가주의를 염두에 둔 용법이라고 볼 수 있다.
하우어즈는 문화적 제국주의와 복음 증거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많은 선교사들이, 특히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신학적 확신 때문에, 주도권에 집착한다”는 대너 로버트Dana Robert의 진술을 인용한다. 예를 들어, 글을 가르치고 깨끗한 물을 확보하기 위하여 우물을 파는 행위조차도 토착문화에 대한 공격일 수 있다는 견해를 소개한다. 하우어즈는 “미국 개신교의 교단주의가 미국이 참여한 전쟁을 열광적으로 지원해 왔다”는 피터 라이트Peter Leithart의 연구를 소개하는데, “이런 교회들은 공통적으로 ‘십자가에 기초한 공교회적 헌신’catholic commitment이 아니라 ‘좋은 게 좋은거다’라는 미국의 통념에 기초한 연합에 헌신하였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종교를 법률로 제정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국가주의적 정책을 위한 통제가 전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민족성 또는 배타성은 라이트에 의하면 미국 이민자들의 지위에서도 나타난다. 이민자 자녀들이 빨리 미국인이 되기 외해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상실하지만, 결국 그들은 좋은 미국인이라는 신뢰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우어즈는 이러한 현상을 아시아의 교회들에 적용하도록 참가자들에게 질문을 하였다. “이러한 민족주의 현상이 미국에만 국한 되는 것이고, 아시아의 교회와는 상관이 없는 것일까?” 그는 아시아 기독교인들이 직면한 핵심적인 도전 중 하나로, ‘이 지역 나라들에서 발견되는 민족주의이 발흥을 어떻게 다루는가’라는 문제를 꼽는다. 과거의 상처들을 극복하고 친구들을 얻으려는 노력, 성령 안에서 연합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를 위하여 하우어즈는 칼 바르트Kahl Barth의 정직한 무지Honest Ignorance를 인용한다.
2. 정직한 무지
바르트는 동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한 편지에서 ‘정직한 무지’를 언급하였다. 당시 그는 ‘맑스주의 땅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섬길 것인가’라는 제목의 편지에서, ‘어떤 조언을 하려면 동독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살아봤어야 하며, 상황과 사람들에 대한 지식의 부족으로 이상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기에, 동유럽 밖의 그리스도인들은 동독의 공산당과 같은 이슈에 대해서는 정직한 무지를 행하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하우어즈는 이 ‘정직한 무지’를 기독교왕국을 극복하기 위한 개념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겸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교회의 정치를 형성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밖에 없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정권도 편애할 수 없으며, 자신들이 스스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우어즈는 이 정직한 무지를, 부르스 케이Bruce Kaye가 말한 ‘공교회성’catholicity과 연결시킨다. 공교회성이란 “기독교 신앙에 지역적인 경험을 뛰어 넘는 더 넓은 차원이 있다”는 관점으로서, 케이에 의하면, 공교회성은 인내, 상호 존중, 겸손과 같은 기독교적 덕목으로 표현된다. 하우어즈는 이 공교회성이 교회 간의 상호교류의 실천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하면서, 특히 미국처럼 인내심 없는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은 인내심과 겸손과 같은 덕목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미국이나 유럽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가, 일본, 중국, 한국, 홍콩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우어즈에게 있어서 정직한 무지, 공교회성, 겸손, 수용, 상호교류 등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소위 기독교적인 정치 강령 또는 정책을 가지고 국가를 통해 전 사회에 무언가를 관철시키려는 것에 대하여 조심스럽다. 그것이 자칫 정책의 절대화 또는 우상화를 가져올 수 있기에, 그는 덕목 등을 통한 간접적인 접근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것을 제도화와 일상화를 통하여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3. 제도화와 일상
하우어즈의 강연에서 특별히 두드러졌던 내용 중 하나는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이다. 그는 “오늘 기독교가 존재하기 위해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강조하였다. 아시아의 교회가 세월을 견뎌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반드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케이에 의하면 제도란 “세월을 지나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인간 행동의 기초적인 가치 위에서 사람과 사물의 관계 패턴에 연속성을 유지시키려는 시도”이다. 제도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안전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안주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하우어즈에게서 이 제도화의 주요한 형태는 ‘덕목’이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구분할 수 있는 차이점으로서, 다른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로, 전쟁으로 상한 이 세상을 살면서 평화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덕목을 갖춘 사람들을 길러내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평화적으로 산다는 것이 갈등이 생길만한 상황을 피하는 것은 아니기에, 하우어즈는 미하일 이냐티에프Michael Ignatieff의 개념을 빌어, 평화의 동의어로서 ‘권리’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냐티에프에 의하면, 이 권리라는 단어는 교육받은 사람들, 중산층 또는 상류층의 사람들, 교사나 학생들에게 친근하며,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은 권리라는 단어보다는 ‘신뢰’, ‘관용’, ‘용서’, ‘화해’, ‘회복력’ 등과 같은 일상적인 덕목을 통해 권리와 평화에 접근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일상적인 덕목은, 매일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힘이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제도화로서의 일상적인 덕목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세계적인 윤리”가 아니다.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뿐 아니라 현실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접적인 접근은 사안으로서 너무나 약해보이는 방식이며, 그리스도인들의 앞에 놓여 있는 상황은 이에 비해 거대한 바위와 같아 보이기에, 하우어즈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신뢰하며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자신과 반대되는 명제들 또는 반대되는 세력들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세워가고 싶은 그런 유혹들을 물리치고, 일상적인 덕목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형성, 재형성함으로써, 하느님의 인내하심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제주 피정을 다녀왔다. 성 이시돌 피정관에 비치되어 있는 ‘명상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읽기 시작하였다. 나는 볼펜과 노트를 사서 정성껏 마음에 다가오는 구절들을 필사하였다.
이 책의 원제목은 ‘What is Contemplation?’이다. 이 책에서는 명상이라고 번역하였다. 한자를 찾아 보니 ‘어두컴컴하다’는 뜻의 명(冥)자를 썼다. 감각에 연결된 피상적인 생각들을 가라앉히고 희미하고 깊은 생각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명상’이라는 용어는 담고 있다. 성전(temple)은 ‘공개된 성별된 공간'(open or consecrated space)이라는 뜻이 있다고 하는데, ‘이 하느님의 궁전(temple)에 하느님과 함께(con) 있는 것’이 contemplation이라’는 씨튼 수녀회 수녀님의 해석을 나는 지금도 좋아한다. 영영사전을 보면 ‘무언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것’ 또는 ‘차분하게 주의를 기울여 무언가를 응시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고, 어원인 templum에 대하여는 ‘바라봄의 장소'(place for observation)라고 되어 있다. 이 단어 안에 이렇게 바라본다는 의미에서 ‘관상’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1. 세상
이 책은 이 신비적 명상이 ‘하느님께 거저받은 선물'(grate gratis data)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제일동인이시라는 점에서 주부적(注賦的, 쏟아 부어 주시는) 명상, 신비적 명상이라고 하기도 하고, 사람은 수동적인 역할을 한다고 해서 수동적 명상이라고 하기도 한다. 결국 사람이 이루어 낸 성취 또는 경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머튼은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함으로써 이 책을 시작한다.
그들은 정말로는 그분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그들의 정신과 마음은 그들 자신의 욕망, 그리고 문제거리, 안락, 즐거움과 그들의 모든 세상 관심거리들,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으로 꽉 차 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온 몸에다가 그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실제로 아무 것도 없는 무한하신 하느님을 두르고는 지구 표면을 떠돌아 다니고 있다.
명상과 성성(거룩함)의 씨앗은 그들의 영혼 안에 뿌려졌으나 그 씨앗들은 그저 잠자고 있을 따름이다. 씨앗들은 싹이 트지를 않고 있다. 그것들은 자라지도 않고 있다.
하느님은 이러한 영혼들에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니, 그들이 정말 깊은 열망으로 그분을 찾지 않는 까닭이다. 그들은 하느님과 세상 둘 다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사람들이다.
2. 영적 선물에 대한 열망
두번째 장에서 머튼은 세상에 속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영적 선물들을 열망하고 받게 되는가에 대하여 토마스 아퀴나스를 인용하여 설명한다. 세상의 일들과 물건들에 마음이 사로 잡혔던 사람이 영적 선물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고 또한 그것을 열망하기 위해서는 체험을 통하여 그것에 대하여 알게 되는 계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으로부터, 귀 기울임과 바라봄과 순명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발췌를 다시 한 번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토마스 아퀴나스
‘세상’이라는 표현은 이 세상의 사(일, 事)과 물(물건, 物)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만일 누군가가 성신과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고 한다면, 그는 반드시 이 세상이 건네 올 것임에 틀림 없는 모든 만족과 이익들로부터 생겨나는 자신의 욕망을 잦아들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영적인 것은 이 세상에서 떠나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도 볼 수가 없다.
세상 것을 붙좇는 사람들은 저급한 사물들에다 그들의 정신을 다 쏟아붓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 한다.
영적인 선물들은 열망되지 않고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인식되는 것이 조금도 없으면 열망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일치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적어도 그와 같은 일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약간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바가 없다면 분명 그러한 일치를 열망할 수 없다.
세상 것을 붙좇는 사람, 그리고 오로지 자기가 하는 활동과 일시적인 이익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그리스도인은 명상을 하고 싶어하는 열망도 없을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능력마저 스스로 내던져 버리기까지 한다.
명상의 기쁨에 대하여 무언가 발견해 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체험이다.
‘보고 맛들여라. 무릇 주님이 맛스러우심을.
그 맛스러움을 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다.
‘만일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면 그는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14:23).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뵐 수 있기에 합당하게 해 주는 것은 다름아닌 순명이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들을 맛 볼 미각을 마련해 주시는 하느님 그분의 뜻에 온전하고도 빈틈없이 양순히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명상이 되게끔 하는 하느님 사랑의 아주 극미한 움직임에 내맡겨 이끌려가는 섬세한 본능이다.
3. 능동적 명상
머튼은 이 책에서 수동적 명상에 대해서 다루면서도 이 장에서는 능동적 명상에 대하여 간단하게 언급한다.
내적인 삶에 관한 모든 전통적인 방법과 실천들은 ‘하느님을 단순히 바라봄으로써’ 우리가 그분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도록 돕는 한에서 능동적인 명상의 부류에 속한다.
능동적인 명상에는 이제 사고와 행위, 그리고 의지 작용이 요청된다. 명상의 기능은 정신을 일깨워 준비시키고, 하느님께 마음을 들어 올리도록 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좀 더 잘 알고자 하는, 그리고 그분 안에 쉬고자 하는 열망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능동적 명상의 대표적인 예로서는 전례(예전)와 일상의 활동들을 예로 들고 있다.
전례: 우리는 ‘그리스도의 하느님 아들이심’에 참여하는 정도에 따라 명상적이 되는데, 그 참여는 거룩한 미사(성찬례) 중에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허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부적 기도에 몰입하는 가장 평범한 길 중의 하나가 거룩한 친교(성체)로 주어지는 은총을 통하여 마련된다고 하는 사실에 조금도 놀랄 까닭이 없는 것이다.
활동 안에서 누리는 하느님과의 일치: 그리스도는 거룩한 삼위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 모두에게 당신을 나타내 보여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비록 그들이 활동적인 일꾼이라고 하더라도, 그들 역시 그들이 행하고 고통받는 그 모든 것들 안에서 순명, 형제적 사랑, 자기 희생, 그리고 하느님 뜻에 완전히 내어 맡김을 통하여 체득된 마음의 지극한 순수성으로 인하여 버금-명상가들인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그리 멀지 않으니, 외양으로나 좀 더 깊은 내적인 삶을 붙좇아 왔던 그런 사람들보다 훨씬 높은 성성의 단계에 이르러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사람들은 하느님을 바라며, 그리고 그분의 사랑만을 바라며 산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분에 대하여 무언가를 알지 않을 재간이 없다.
4. 수동적(주부적) 명상
수동적 명상은 하느님께서 쏟아 부어 주시는 선물이다. 하느님께서 부어 주시는 사랑을 직관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엄밀한 말 뜻에서 볼 때, 명상은 하느님께 대한 초자연적 사랑이요 인식이니, 그분에 의하여 영혼의 그 꼭데기에 부어져 내린, 단순하고 어둑한 것으로서, 그것은 영혼으로 하여금 직접적이고도 체험적인 그분과의 만남을 이루게 해 준다.
신비적 명상은 순수한 사랑에서 난 하느님에 대한 직관이다.
성 베르나르도
‘그분 자신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명상은 순수 사랑의 발전이여 완성 그 자체이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모든 사랑의 으뜸된 대상이신 하느님께 대한 순수하고 무사한(無邪, 간사함이 없는) 사랑으로써 사랑하는 것만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완전한 기쁜이요, 모든 보상 중에서 최고의 보상일 수 있는 까닭에, 사랑한다는 바로 그 행위가 사랑에 대한 가장 탁월한 상급인 것이다.
사랑은 자기 이외의 원인도 결과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자체 결과요 그 자체 수단인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까닭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한다.
5. 어둠 속 빛살
머튼은 이러한 은총의 선물이 때로는 고통과 메마름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내적인 것에서 멀어지고 외적인 것에 다시금 몰두하게 된다고 한다.
명상을 통하여 체험되는 하느님의 현존은 언제나 영혼에게 평안과 강한 기운을 가져다 준다고 하는 것은 진실이다. 하나 때로 그 평안은 고통과 어둠과 메마름 속에 온통 파묻혀 버리기도 한다는 것 역시 진실이다.
기운찬 힘은 때로 우리 자신이 극도의 무기력, 무능을 느끼게 된 상태에서야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다.
명상을 처음 시작하면서는 특히 그것이 그대에게 하느님에 대한 분명하고도 똑 부러진 어떤 인식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라.
햇빛이 병든 눈을 자극하듯 하느님의 빛은 저 영혼을 자극한다. 그 빛은 통고를 일으킨다.
주부적 명상 안에서 얻는 하느님 체험은 영혼이 그분에 관하여 상상해 왔던 일체의 것에 대한 전면적인 모순이다. 그분의 주부적 사랑의 불꽃은 인간적인 위안들에 연연해 하고 있는, 그리고 초보자였을 때에는 필요로 했었던 그런 빛과 느낌들을 그릇되이도 기도의 무슨 커다란 은총인 양 상상하면서 그런 것들에 집착하고 있는 영혼의 자기애에다 가차없이 공격을 퍼 붓는다.
그렇게 되면 조만간에 주부적 명상은 영혼 안에 겁나리만큼 무서운 내적 변혁을 가져온다. 기도의 감미로움은 사라져 버린다. 묵상은 불가능해지고, 싫어지기조차 한다.
내적인 생활은 어둠과 메마름과 고통으로 가득차게 된다.
이 때가 기도 생활에서 결정적인 순간이다.
그 빛살이 너무 강렬하여 그들이 눈 멀어 버린 까닭에 그들에게 그 빛은 어둠 속 빛살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처지에 저항한다. 그들은 스스로가 자신의 길 안내자이기를 원한다.
그들은 전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볼 때 그들은 여전히 하느님께 충실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심기고자 애쓴다. 그러나 그들은 내적인 것들에 등을 돌리고 외적인 것들에다 자신을 몰아 붙인다.
6. 시험
머튼은 모든 어두움이 명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징표가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순수한 사랑은 그러한 어둑한 가운데서 빛을 발한다고 말하였다.
일반 원리들은 하나하나의 구체적 사례에 적용될 때에야 비로소 유용하다.
묵상을 하는 도중에 겪는 건조함이나 덕을 쌓기 위하여 분투하면서 느끼는 무력은 그 자체로 명상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확실한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적 생활에서 나타나는 메마름과 무력은 죄나 불충실의 결과이거나, 혹은 단지 게으름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어려움들은 건강이 나쁜 데서 발생한 것일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괴로움 그 밑에서, 어둠의 장막 그 뒤에서, 고통 그 너머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확실하고도 긍정적인 표지들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이 표지들은 그 시련들이 주부적 기도의 질서에 속하는 정화일 수 있게끔 해 줄 것이다.
(평안, 잠심 그리고 열망)
그렇지만, 만일, 그렇게 어둠 속으로 이끌려든 영혼이 거기에서 깊은 잠심을 찾아 얻고 세상과 물직적인 것들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뒷전으로 잦아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 물론 흐트러짐이 있어, 영혼의 열망에 맞서서 끊임없이 영혼을 괴롭힐지라도 – 이 역시 주부적 기도를 드리는 증거가 될 것이다.
기쁨과 평안과 충만함은 오로지 메마름과 믿음의 이 고독한 밤 어딘가에서만이 찾아져야 한다는 확신이 자라난다.
영혼은 어느 날, 이 어둠 속에서 그가 살아께신 하느님을 만나 뵈었다는 것을, 도대체가 기대해 본 적도 없는 놀라운 방식으로 깨닫기 시작한다.
그분이 거기 계시고, 그기고 그분의 사랑이 사방팔방에서 자기를 에두르고 있고 자기를 빨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에… 그 순간에는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 외에 다른 중요한 실재라고는 존재하지를 않는다.
어둠은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어둑한 그대로다. 하나 그것은 가장 밝은 한낮보다도 더 밝아진 것 같이 느껴진다.
비록 외적으로야 고통과 시련과 노고가 배가될지라도 그 영혼의 내적인 삶은 지극히 단순해진다. 그것은 한 생각, 한 사랑으로 되어 있다. 하느님 홀로만으로.
그것은 순수하고 단순한 사랑이니, 이 사랑은 성 베르나드도가 말한 것처럼 영혼의 다른 모든 활동을 자기 안으로 이끌어서 흡수해 버린다.
‘사랑은 그밖의 모든 것들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고 열정을 사로잡는다.’
이 주부적 사랑은 그 모든 힘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그것들을 그분께로 들어 높인다. 그의 열망과 애착심을 점점 더 세상과 썩어 없어질 것들에서 떼어놓으면서 말이다.
7. 무엇을 할 것인가 – 십자가 성 요한의 가르침
머튼은 십자가의 성 요한을 통하여 오직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정화하는 데에만 집중하라고 권면한다.
명상기도를 할 때 훌륭한 지도, 훌륭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하느님께서 그대 영혼 안에서 하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종의 깨달음을 얻는 일이다.
모든 자연적인 확신에 관하여 그대의 정신을 어둡게 하고 비워내는 그리고 살아계신 하느님과 실제 체험적으로 대면하는 문턱으로 그대를 이끌어 가기 위하여 그대를 불명료한 영역으로 인도하는 이 어스레하고 때로는 극고極苦를 일으키는 믿음의 빛의 놀라우리만큼 엄청난 가치를 배우라.
그대 삶에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할 것은 어떤 것도 피하도록 하라. 그대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평안과 고요와 은거 안에 살라.
그리고 설령 하느님께 제아무리 커다란 영광을 드릴 것 같아 보이는 수고와 직분이라 하더라도 그런 것들에 휘둘려 그대의 길을 이탈하지 않도록 하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들려는 그대의 열망을 보여드리기 위하여 그대가 할 수 있는 한 완전하게 사심없는 사랑과 커다란 평안 속에서 그대에게 맡겨진 직무들을 수행하라.
그대가 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잠심을 유지하라. 또한 하느님께서 그대 안에 부어 주시고 있는 단순한, 그리고 단순화하는 빛살을 누리며 거기서 쉬어라.
기도를 해 자가는 과정에서 그대가 얼마나 진전을 보았는가 하는 문제로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오직 한가지만을 찾아 구하라. 하느님께 대한 그대의 사랑을 더더욱 정화하는 것. 더욱 더 완전하게 그분의 뜻에다 그대 자신을 내맡겨 드리는 것. 보다 오롯하고 보다 완전하게. 뿐만 아니라 보다 단순하고 보다 평안하게. 그리고 보다 온전하고 굽힘 없는 신뢰를 가지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
성성과 명상은 오로지 정화된 사랑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을 따름이다.
위대한 활동가인 사람들, 그리고 세상을 자기들의 외적인 업적들로 싸감으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켜 주도록 하자.
만일 그들이 그런 일들을 하는 데 쏟는 시간의 반만이라도 기도를 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있는다면 그들은 훨씬 더 많은 유일을 교회에 가져다 주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는 훨씬 더 커다란 즐거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틀림없이 그들은 불과 한가지 일로 그들이 지금 수천가지 일들로 이루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훨씬 적은 수고로 이루어 낼 될 것이다.
아주 보잘 것 없는 이 순수한(신비로운) 사랑이 다른 모든 업적들을 한데 모아 놓은 것보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더 귀하며 교회에 더 커다란 유익이 된다.
8. 정적주의의 위험
이 비움은 비움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의 사랑으로 채워지기 위한 것임을 머튼은 명확히 한다. 이 기도는 조용함과 마음의 고요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주님을 기다리고 열망하는 기도인 것이다.
명상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만의 사랑으로 채워지기 위하여 자기 자신에게서 모든 창조된 사랑을 비워 낸다. 그리고 그의 영혼 맨 위로 곧장 내리 비춰지는 하느님의 순수하고 단순한 빛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그의 정신에서 모든 창조된 형상들과 환영들을 몰아낸다.
반면에 정적주의자는 자기 자신의 영혼의 철저한 무화無化라는 거짓된 관념을 붙좇으면서 그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사랑과 모든 지식을 비워내려고 애쓴다.
그리고는 움직임도 없고, 생각도 없고, 지각도 없고, 사랑의 행동도 없고, 수동적인 감응도 없는, 게다가 내적인 삶의 빛이라든가, 다사로움, 생기, 어느 것 하나 없는 단지 공허만이 있을 따름인 어떤 영적인 진공속에 무기력하게 남아 있다.
실상 참된 명상자는 그가 하느님에 대한 열망 없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그 사실로 하여 고통을 겪는다.
사랑과 겸손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으라. 그러면 그대는 그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기다리며 쓸쓸함과 고독과 메마름과 번뇌에 휩싸인 그대로 있는 것에 만족하라. 고난의 밤에 그분께 대한 그대의 말 못할 그리움은 그대의 가장 감동 깊은 기도가 될 것이고 그대에게, 그리고 교회에 훨씬 더 값질 것이며, 지성이나 상상력이 가장 높은 자연적 단계에로 고양된 것보다도 더한 영광을 하느님께 드리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은총의 첫 열매들을 맛본 그대여, 그분을 찬양하라. 그분께 영광을 노래 불러 드려라.
그리고 그대 영혼 안에 그분의 위대하신 일을 계속 이루어 주시도록 그분께 기도 드려라.
우리의 마음 안에서 범접할 수 없는 빛으로 당신 아드님과 함께 사시는 아버지시며, 사랑을 빚으시는 분이시여, 우리 영혼 안에 성령의 일곱 선물을 보내 주소서.
죄에서는 물론이고 지상에서 얻은 모든 덧엇는 지혜에서도 우리의 정신을 깨끗이 하여 주소서.
또한 우리로 하여금 단순하고 참되이 당신의 지극한 성지聖志를 유순히 따르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 아드님 예수의 빛이 우리의 삶 속에서 밝게 비추게 되고, 당신께 영광을 드릴 수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