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으로 인간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느님]

2025. 1. 5. 성탄 2주일


올해 새해 첫 예배인데 이 새 예배를 요한복음 1장으로 시작하니까 너무 감회가 새로운 것 같아요.
전에 요한복음 1장이 화려하게 적힌 액자가 있어서 알아 보았더니, 오래 전 라틴 전례에서는 미사가 끝날 때마다 사제가 제대 위에서 요한복음 1장을 읽었다고 합니다. 성육신의 신비를 신자들과 함께 묵상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요한복음 1장의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정말 기쁜 소식과 신앙의 진리를 정말 깊게 담고 있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하느님의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직접 오셔서 정말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맡겨주셨습니다. 성육신의 신비 또는 강생의 신비가 얼마나 우리들에게 큰 기쁨인가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것 같아요.


  1. 누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개신교는 공생애의 종교다 이렇게 얘기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같이 제자들과 사람들과 함께 시련도 당하시고 어려움도 겪으시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시는 거기에 굉장히 초점을 나누고 있다고 한다면.
  2. 정교회는 부활의 포커스가 있다 이런 얘기를 해요. 그래서 부활에서 정교회는 굉장히 부활심장이에요. 부활심장이 중요하고 승리하신 그리스의 영광에 굉장히 초점이 맞춰져 있죠. 그래서 러시아 대문호 중에 부활이라는 글을 쓰신 분도 있고 그런 게 굉장히 우연이 아니다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3. 그리고 가톨릭에는 뭐가 포커스냐 그러면 굉장히 고난에 초점을 맞춰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 그리고 거기서 온 세상의 인류를 위해서 고통을 받으신 주님 앞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이렇게 들었어요.
  4. 그에 비해서 성공에는 어디에 초점이 있냐 라고 하면 어디에 있는 것 같아요. 이 성공에는 대단히 성육신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이렇게 오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 우리 성공회에서는 이 성탄절기와 이 공연절기가 또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예수님의 입장에서 하느님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이곳에 내려오신 성육신이지만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것은 성화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정말 이 미천하고 정말 하느님도 알 수가 없고 정말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하느님께 오심으로써, 저희들이 거룩하게 되는 그런 역사를 정말 우리 입장에서는 얘기할 수 있는 것 같아요.

  1. 기도를 많이 하신 분들이 그 얘기하시는 거는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과정을 몇 단계로 얘기하죠. 그래서 처음에는 깨끗하게 하신다고 그러죠.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옛날에 나쁜 짓 한 거 나쁜 생각 한 거 이런 걸로 어지러워 걱정 근심 이런 걸로 어지러워져 있는 우리들의 생각을 하느님께서 하나하나 이렇게 만지셔서 좀 가라앉게 해주시면.
  2. 그 다음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비춰주신다고 그래요. 그래서 우리들 마음을 이렇게 착 비춰주시면 이것이 무엇이 진리였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고 이런 걸 알게되지요.
  3. 알게 되면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거룩하게 만드셔서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는 거룩한 사람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신다고 해서 이 성화를 마지막 단계로 하죠.

근데 그것이 어떤 단계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고 해요. 그래서 거꾸로 되는 경우도 있고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만 그냥 우리가 인식의 순서로는 정화시키시고 우리들을 밝은 빛으로 비춰주시고 우리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으로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들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들의 성화, 우리들의 미천하는 우리들을 당신의 뜻으로 거룩하게 하는 그런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 우리 서방교에서는 성화인데 정교에서는 또 좀 다르게 얘기해요. 정교에서는 신화라고 해요. 인간을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신다고 하였지요. 인간이 하느님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이 거룩하게, 그 하느님. 그 높은 곳으로 하느님의 뜻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주셨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굉장히 탁월한 통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궁금해가지고 뉴스를 봤어요. 유튜브를 봤더니 밤새도록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은박지 같은 거 이렇게 하고 거기서 새벽 3시인데 거기서 새고 있는 게 나왔어요. 길에서 막 거기서 은박지 덮고 자고 그래서 너무 또 미안하기도 하고.
다 보니까 어리고 그래서 아휴 정말 나는 여기서 편안하게 이렇게 자고 일어나는데 정말 저런 사람들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어떤 고등학생이 한 얘기가 생각났어요. 자기네 엄마는 이찌기고 태극기 부대고, 자기 증조부는 친일파여 일본 순사랑 같이 막 웃으면서 사실, 손짓고 그렇지만 나는 그래도 여기에서 나와서 우리나라의 밝은 내일을 위해서 힘을 합치고 싶다 그리고 이것을 감추고 싶지만 감추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면서 우리의 미래를 더 좋게 만들겠다 이렇게 얘기하는 걸 보면서 감탄했어요.


아 그래, 우리가 남자 여자로 갈리고 나이대로 갈리고 빈부로 갈리고 그렇지만 그런 것을 어느 순간에 다 뛰어넘어서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멋있는 힘이 우리들 속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거 굉장히 불교적인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다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서로 다 연관이 되어 있고 그래서 더 높은 그런 내 작은 나가 아니라 더 큰 나로 나아간다라는 생각을 하니까 멋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서의 진리는 모두 이러한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어, 다른 사람의 고통과 갈망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이지요. 오늘 읽은 말씀 구약에 말씀이 선포된 것도 사실은 노예생활의 그 어려움 속에서 그 반추로부터 나온 것이고 또 메시아를 기다렸던 그 갈망도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하는 그 어려움 가운데서 나온 것이지요. 또 그리스도가 오시는 걸 기다렸던 그 수많은 마리아나 그런 데 나온 것이고 그들의 그런 역사로부터 나온 것이지요.

오늘 우리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열망하는 그것도 옛날에 서울의 봄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통해서 본 우리가 저런 어두운 그런 것들을 다시 돌아가면 안 된다는 그 어두움에 대한 그런 성찰로부터 이 밝음과 한 단계 높은 것으로의 길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제 새해가 됐는데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면 정말 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런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고 힘들 것도 있어요. 그런데 옛날에 곤도마리에인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집안을 정리하면서 많이 버리라고 그러잖아요. 버릴 때 이렇게 버리지 말고 버리는 그 물건한테 고마웠다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 그러면서 버리라는 거예요.

어쩐지 그게 좀 어리석은 일인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래요. 버리는 것도 그냥 확 이렇게 버리지 않고 그렇게 버리려면 좀 뭔가 마음에 더 못 버리는데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 그러면서 버린다고 하는 그 마음이 더 잘 버릴 수 있고 내 마음을 또 버리는 나의 이런 마음을 달래주는 면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난 한 해를 우리가 돌아보면서, 또 여러 가지 안 좋은 일도 있고 그래서 그것을 또 버리려는 마음, 새로운 것을 바라는 마음도 있겠지요. 하지만 성경에 나온 많이 기다렸던 사람들처럼 지난 우리가 살아왔던 그 과거를 정말 감사하면서 그 소원에 우리의 모든 소중한 순간들과 소중한 희망들을 다시 잘 추려서 밝아오는 이 해에 우리가 맞이해야겠습니다.


이 하느님의 진리가 우리가 알 수가 없죠.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알기 쉽게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 진리는 무엇입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겁내지 말고 하느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다. 또 미천한 우리들을 그 하느님의 높은 뜻에 그 우주적이고 커다란 그 따뜻한 꿈속에 우리들을 동참시킨다고 하는 그런 막연하지만, 실낱같은 성육신의 희망을 일깨워주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희망으로 오늘 이 시간의 기도를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희망을 품고 나아갑니다]

2024. 12. 29. 성탄1주일


아이들이 길을 잃는다는 것은 아이 자신과 부모들에게 모두 충격적인 상황입니다. 제 친구 중에 하나가 어렸을 때 길을 잃어버렸던 이야기를 하는데요. 그러니까 어머니 아버지하고 손을 놓치고 길을 잃어버려서 이쪽에 있는 소도시에서 저쪽에 있는 소도시까지 울면서 걸어갔대요. 그 고속도로를 따라서. 그동안에 이제, 집에서 막 찾고 난리가 났었죠. 근데 아이들은 길을 잃어버리면 그냥 앞으로만 간다고 그러더라고요, 울면서요. 그래서 그렇게 먼 길을 밤새도록 이렇게 걸어갔었던 그 얘기를 하는데, 그 아이는 얼마나 놀랐으며 그 부모는 얼마나 놀랐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도 사실은 공항에서 제가 영국으로 출장하는 날인데 잠깐 이렇게 딴 데 보고 있는 한 1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애가 없어져서요. 그날 출장할 비행기는 떠야 되는데 애는 2층, 1층 다 뒤져도 없고. 그래서 출장을 취소할 때쯤 됐을 때 어디서 전화가 온 거예요. 얘도 비슷하게 울면서 앞으로만 가다가 다행히 옆에 있는 어떤 아저씨한테 핸드폰을 달라고 해서, 전화를 한 거예요. 그래서 찾았던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도 어렸을 때 오늘 성경말씀 보면, 그렇게 좀 부모가 길을 잃어버린 얘기가 나와요. 근데 이게 이제 유태인들은 어떻게 되어 있었냐면. 그 당시만 해도 명절날(유월절)이 되면 다, 우리가 명절에 고향을 찾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예루살렘에 모여서 예루살렘에서 같이 예배를 하고 거기서 순례를 하고 집으로 가게 되어 있었고요. 요즘에 가족이 그냥 다 핵가족인데 그 당시만 해도 큰 친척들이 같이 내려가니까 애들은 애들끼리 막 사촌들하고 같이 해가지고 내려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 어디엔가 있겠지 그러고 내려가다가 나중에 알게 된 거죠. 그래서 이 부모가 그 길을 거슬러서 올라오면서 그 인파가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거 계속 걱정하면서 이거 우리 애기 완전히, 지금 엄만한, 아빠 혹시 얼마나 지금 그러고 있을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그런 것을 한 게 마리아가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왜 우리를 애태우르냐. 널 찾느라고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이런 얘기가 그래서 나오는 얘기죠.


그런데 오늘 이 장면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많이 들었어요. 우리가 하느님께 충실하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일관성 있게 살아야겠다고 열심히 살아가는데 인생을 살다 보면 그 전제 그렇게 열심히 이쪽으로 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하느님이 원했던 방향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라는, 그런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유치한 예를 들면, 제가 사제로서 30년을 살고서 하느님 앞에 섰더니, 그래서 ‘하느님이 전 열심히 주님의 일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하면요. 그런데, 그런 비유가 있죠. ‘나는 네가 뭐 했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나오잖아요. 그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이 방향으로 한다고 했던 그것 자체도, 하느님께서 ‘그것도 아닐 수도 있어’ 라고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통해 보았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안전하게 잘 보살피고 양육하는 것이 최고의 의무이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 당신은 그보다는 ‘이스라엘이 갈 길과, 이 인류가 앞으로 어떻게 가야 될 것인가’를 거기에서 같이 의논하고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하시는 거죠. 이러한 이 괴리감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느낄 때가 많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우리들에게 오는 축복들도 너무나 우리가 기대하지도 못했던 큰 축복들이 우리들에게 정말 아무 값 없이 주어지는가 하면, 또 우리가 누렸던 그런 것들이 어느 순간에 또 위협을 받거나 사라지게 되거나 또한 이 세상을 떠나야 되는 그런 상황을 만났을 때 우리는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굉장히 마리아와 요셉처럼 큰 축복을 누리는 생활 속에서도, 질문과 곤경에 빠지게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 엄무광 선생님의 ‘향심기도 강연’ 테이프를 듣고 있는데, 계속 내려놓는 훈련을 시키더라고요. 그분은, 생각들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기도할 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자꾸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내려놓는 연습을 하라고 하는 데요. 그 이유는, 우리가 가장 중요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도, 하느님 앞에서 내려놓을 수 있고 상대화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우리가 항상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끊임없는 충실함으로 나아가되, 주님 앞에서 그 또한 내려놓으라고 했을 때는 기꺼이 내려 놓을 수 있는 지극한 충실함으로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될 것은 이 신실함과 같은 말이 끊임없는 사랑이라고 하는데요. 변함없는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 신실하신 하느님의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항상 마음 아파하시고 정말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는 주님의 신실하심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함께 모여서 예배를 준비하면서 조금 일찍 오신 분들과 나눈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난해가 너무 어려운 한 해였고 너무 위험한 것도 많은 한 해(제주항공 폭발 사고 등)였는데 앞으로 오는 해도 좀 걱정이 된다. 어떤 분이 그러셔서 우리가 좀 서로 그래도 우리 새로운 해를 희망으로 맞이하자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이런 뜻밖의 일들을 만나고 그렇지만 우리가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끊임없는 사랑, 신실하심, 하느님의 그런 자비하심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가야겠습니다.

우리 앞에 어떠한 기쁜 일과 슬픈 일과 어떤 소망과 또는 절망이 닥치더라도 항상 그러한 신실함을 귀히하고 꾸준히 살아가는 우리 한해가 지난 2024년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 동터움을 느끼고 그런 새해를 맞이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우리 잘 사라지기로 해요]

2023. 12. 22. 대림 4주일


안녕하세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이콘 중에 하나가 성모 왕문 – ‘성모께서 엘리자벳을 방문하시다’라는 이콘이에요. 나이 많은 여자 한 분과 나이 젊은, 파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가 서로 손을 맞잡는 그 그림이 저는 참 좋더라고요.
당시에 마리아로서는 예수님을 잉태하는 것 자체가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가 없는 그런 기적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이게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을 거예요. 이미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에게 얘기할 때, ‘은총이 가득하신 이여’ 이런 얘기하잖아요. 그게 사실은 그 당시에 굉장히 귀족층이라든가 왕족 이런 사람들한테 붙이는 칭호래요. 그런데 그냥 갈릴레아 뭐 이런 데 살고 있는 그냥 시골에 있는 젊은 아가씨한테 천사가 나타나서, 마치 저기 고위층에게 얘기하듯이 은혜를 가득히 받으신 이어 이렇게 얘기하니까, 마리아가 그때 굉장히 깜짝 놀라면서 그 이야기를 들었죠.


하지만 인간은, 천사의 계시도 필요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들의 인정과 공감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엘리자벳도 그 당시에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아이를 갖게 된 가졌잖아요. 그래서 그 얘기를 듣고 나하고 비슷한 사람이니까 나에게 뭔가 위로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있겠다. 그래서 찾아갔었을 것 같아요. 산동네에 살고 있는 엘리자벳에게 찾아가서 여기 보면 세 달 정도 있었다고 해요. 그 당시에 사회에 그걸로 봐서는 제 약혼한 상태인데, 일찍 임신한 것이 금기시되고 그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아기가 낳을 때까지 거기에 오랫동안 머물렀죠.


그렇게, 우리 인간은 살면서 정말 어떤 그런 공감과 옆에 있는 사람들이 ‘괜찮아’라고 이야기 해 주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참 그런 기억이 어렸을 때 있었나 생각을 해보니까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정말 그런 분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전학을 가면서 굉장히 많이 위축이 돼 있었고 그 당시 학급이 60명 70명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학생들 한 명 한 명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기가 어렵고, 저는 주로 야단을 많이 맞고 살았는데 5학년 때 선생님은, 잘한 것 같지도 않은데, ‘야 너 참 잘했다’ 이렇게 몇 번 해주셨어요. 그런데 그게 저한테는, ‘그래도 우리가 선생님이 좋아하는구나’ 이런 느낌을 가져서 그때 좀 자신감도 생기고 학교에 가는 것도 더 좋아졌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기억에 나는 걸로는 몇 번 되지 않지만 그 짧은 그런 몇 마리가 힘을 주었어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남의 짐을 져주기는 정말 어렵고 자기의 그런 짐을 지고 가기도 벅차지만, 그 중에 조그만 무언가를, 다른 사람에게 한 5천 원어치라도 던져 줄 수 있으면,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큰 삶의 운동력이 되기도 하고 새로운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계시만 가지고서는 부족한 옆에 있는 누군가가 사람이 격려해지고 위로해주는 것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입니다.


대림절기도 다 지나가고 이제 자주색 영대를 하는 날도 이제 다 끝나고, 대림초 네 개도 다 이렇게 켜지니까, 아 정말 한 해가 저무는 감회가 새롭습니다. 요즘 집에 있는 사진첩들을 다 청소하면서 봤더니 옛날에 찍어놓은 사진들이 있어요. 근데 20년 전 사진을 보니까 ‘아 이런 때도 있었네’ 하는 생각이 들고, ‘아 그 이때도 살아 있었구나’, 그래서 굉장히 낯설게 옛날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요즘에 ‘안리타’라고 하는 분의 시집을 지금 두 권째 읽고 있는데 거기에 ‘살아진다 사라진다’라고 하는 시집입니다. 올해를 마감하는 저의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이 시인이 살다 보니까 사는 맛이 없을 때도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살고 싶지 않다’ 그래도, 살아지는 거예요. 그리고 ‘살고 싶다’ 그런 때도 똑같이 살아지는 거죠. 그런데 또 한편, ‘떠나가지 말라고 해도 떠나가고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그 계절 속에서 내가 이렇게 나의 하루하루가 사라지고’, 그렇게 저의 올해 한 해가 사라지는 것처럼, 시인의 인생도 그렇게 사라져가고 있죠.
그래서 우리가 원하든 안 하든 우리가 살아가고 있고 사라지고 있는 이 순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네요. 마지막 구절만, 세 문장이니까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네, 살고 싶지 않아도 살아지고 살고 싶은 날에도 살고 있는
이런 알 수 없는 생의 한가운데를 올해 서성입니다.
단지 우리 잘 살아지기로 해요.
그리고 우리 잘 사라지기로 해요.

제가 희년교회에 온 지 조금 시간이 지나서, 이제 서로 조금 편해질만큼 시간이 흘렀네요. 이곳에 와서 저희가 나눈 것은 굉장히 적지요. 주일날 1시간, 2시간 나눈 거지만 그것이 서로들에게 힘이 될 때도 있고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라지고 있는’ 소중한 시간, 우리가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살아지고 있는 이 시간에, 조그만한 그런 격려와 힘이 서로에게 될 수 있는 그런 공동체로 2025년을 맞을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성모가 엘리자벳을 만난 그 기쁨으로, 우리 서로에게 격려가 되는 이 기도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