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을 둘러싼 슬픔과 위협
오늘 성경에 라헬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오는데 라헬은 누구인가요? 야곱의 부인이 둘이 있는데 그 둘째 부인입니다. 야곱은 레아한테서는 자식이 열 명 낳은 반면, 라헬에서는 요셉과 벤야민 두 아들을 낳았었죠. 그런데 이복 형들이 요셉을 미워해서 죽이려고 하지요. 결국 사막을 여행하는 노예상인에게 팔아버리고, 아버지한테 뭐고 했나요?
“아버지! 요셉이요, 처참하게 늑대한테 잡아먹혀 죽었어요.”
그리고 그 요셉이 입었던 옷에 피를 묻혀가지고 갖다 주잖아요.
그래서 라헬은 자식 둘 중에 한 명이 들판에서 그렇게 무참하게 죽은 것으로 알고 살은 거죠. 그런 라헬의 마음을 표현한 시 구절이 오늘 나옵니다.
“자식잃은 라헬, 위로마저 마다하는구나.”
그렇게 비참함 세월을 살았던 라헬의 모습과, 무고하게 성탄 즈음에 헤로데에게 살해당한 이 천여 명의 아기들, 그 부모들의 마음을 성서는 중첩시킵니다. 과학자들은 예수님이 탄생할 즈음에 목성인가가 별자리가 행성계의 중요한 위치에 들어왔덨다고 합니다. 그래서 역성혁명이 일어날 징조라고 보았는지, 아무튼 헤로데가 그 근처 일대에서 무슨 왕이 될 만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얘기를 듣고 한 이천 명 정도 아기를 다 죽였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모들의 그 슬픔을 라헬의 오늘 슬픔에 비유를 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같이 예수님의 성육신은 우아하게 목가적으로 볼 수만은 없는 긴박함을 띠고 있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을 뒤집어 보면, 아기를 누일 장소가 없어 말이 먹는 여물을 담는 통, 그 위에 누워서도 편하게 있지를 못하고, 이 엄청난 그 살육의 현장 사이에서, 이렇게 피해 살아야 하는, 그런 장면이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도 방식: 거대한 계획이 아닌 한 걸음의 빛
그런데 그 천사의 지시를 보면 어떻습니까? ‘일어나라, 데려가라, 피해라’, 이렇게 얘기를 하죠. 그다음에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올 때도, 어떤 장기적인 플랜을 얘기해주지 않고, ‘일어나라,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라,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이렇게 알주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이 여정은, 그냥 위험에서 안전으로 딱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직선적인 과정이 아니라, 그야말로 즉흥적이고, 신뢰와 불안이 섞여 있는, 그런 아슬아슬한 길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뭔가 확실한 것을 보장빋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우리의 일자리에 대해서, 우리의 건강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 교회의 앞날에 대해서 그리고 세상의 방향에 대해서 뭔가 확실한 것을 원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어떤 확실한 어떤 큰 마스터 플랜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과 우리의 한 걸음을 비칠 만한 빛만 비치게 해 주십니다.
요셉에게 어디로 가라 하신 것처럼, 그 한 치 앞의 그것만 우리들에게 알려주시죠. 그렇기에, 우리들에게는 우리들의 기도는 어떤 해답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그런 불확실한 인도를 따를 용기와 믿음을 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은 나자렛으로 돌아오죠. 나자렛은 어떤 곳입니까? 나자렛은 별로 눈에 띄지 않고 그다지 훌륭하지 않고 그냥 시시한 그냥 일상생활이 있는 곳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자렛에서 그들과 함께 하신 것 같이, 우리들이, 위엄이 있는 곳에서만이 아니라, 시시콜콜한 일상생활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갈릴레아로 초대하시어, 서로에게 말하는 법을 배우고 일하고 우정을 쌓고 신실함을 익혀가도록 하십니다.
신앙의 적용: 교회의 여정과 네가지 원칙
지난 한 해에 우리 희년교회 발자취를 보면서 우리는 굉장히 우리들의 발자취가,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이집트로 가는 그 발자취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희망: 우리들은 그들과 같이, 현실을 직시하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동반자: 우리는, 쉽게 말로 위로하려고 하기보다는, 사랑으로 곁에 서로 있는 그런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경청과 실천: 우리는 늘 조용한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고, 장기적인 플랜을 예측할 수 없을 때에도, 한 걸음 한 걸음 실천하는 용기와 성실성으로 일상을 봉헌하였습니다. 궁극적 신뢰: 우리는 신뢰, 모든 자리에 하느님께서 계시고 우리들에게 평안의 길로 이끌어주신다는 신뢰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앞으로 2026 년 우리의 삶은 어떻게 진행될까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마스터 플랜으로 주시진 않으시지만 우리 발 앞의 빛을, 약간의 빛을 주실 줄은 믿습니다. 2026 년도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되 하느님께 늘 희망을 가지고 또 서로가 쉽게 위로의 말을 하기보다는, 서로가 옆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조용히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결국에는 본향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면서 걸어가는 그런 복된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