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삶

탄생을 둘러싼 슬픔과 위협

오늘 성경에 라헬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오는데 라헬은 누구인가요? 야곱의 부인이 둘이 있는데 그 둘째 부인입니다. 야곱은 레아한테서는 자식이 열 명 낳은 반면, 라헬에서는 요셉과 벤야민 두 아들을 낳았었죠. 그런데 이복 형들이 요셉을 미워해서 죽이려고 하지요. 결국 사막을 여행하는 노예상인에게 팔아버리고, 아버지한테 뭐고 했나요?
“아버지! 요셉이요, 처참하게 늑대한테 잡아먹혀 죽었어요.”
그리고 그 요셉이 입었던 옷에 피를 묻혀가지고 갖다 주잖아요.

그래서 라헬은 자식 둘 중에 한 명이 들판에서 그렇게 무참하게 죽은 것으로 알고 살은 거죠. 그런 라헬의 마음을 표현한 시 구절이 오늘 나옵니다.
“자식잃은 라헬, 위로마저 마다하는구나.”

그렇게 비참함 세월을 살았던 라헬의 모습과, 무고하게 성탄 즈음에 헤로데에게 살해당한 이 천여 명의 아기들, 그 부모들의 마음을 성서는 중첩시킵니다. 과학자들은 예수님이 탄생할 즈음에 목성인가가 별자리가 행성계의 중요한 위치에 들어왔덨다고 합니다. 그래서 역성혁명이 일어날 징조라고 보았는지, 아무튼 헤로데가 그 근처 일대에서 무슨 왕이 될 만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얘기를 듣고 한 이천 명 정도 아기를 다 죽였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모들의 그 슬픔을 라헬의 오늘 슬픔에 비유를 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같이 예수님의 성육신은 우아하게 목가적으로 볼 수만은 없는 긴박함을 띠고 있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을 뒤집어 보면, 아기를 누일 장소가 없어 말이 먹는 여물을 담는 통, 그 위에 누워서도 편하게 있지를 못하고, 이 엄청난 그 살육의 현장 사이에서, 이렇게 피해 살아야 하는, 그런 장면이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도 방식: 거대한 계획이 아닌 한 걸음의 빛

그런데 그 천사의 지시를 보면 어떻습니까? ‘일어나라, 데려가라, 피해라’, 이렇게 얘기를 하죠. 그다음에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올 때도, 어떤 장기적인 플랜을 얘기해주지 않고, ‘일어나라,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라,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이렇게 알주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이 여정은, 그냥 위험에서 안전으로 딱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직선적인 과정이 아니라, 그야말로 즉흥적이고, 신뢰와 불안이 섞여 있는, 그런 아슬아슬한 길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뭔가 확실한 것을 보장빋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우리의 일자리에 대해서, 우리의 건강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 교회의 앞날에 대해서 그리고 세상의 방향에 대해서 뭔가 확실한 것을 원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어떤 확실한 어떤 큰 마스터 플랜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과 우리의 한 걸음을 비칠 만한 빛만 비치게 해 주십니다.

요셉에게 어디로 가라 하신 것처럼, 그 한 치 앞의 그것만 우리들에게 알려주시죠. 그렇기에, 우리들에게는 우리들의 기도는 어떤 해답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그런 불확실한 인도를 따를 용기와 믿음을 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은 나자렛으로 돌아오죠. 나자렛은 어떤 곳입니까? 나자렛은 별로 눈에 띄지 않고 그다지 훌륭하지 않고 그냥 시시한 그냥 일상생활이 있는 곳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자렛에서 그들과 함께 하신 것 같이, 우리들이, 위엄이 있는 곳에서만이 아니라, 시시콜콜한 일상생활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갈릴레아로 초대하시어, 서로에게 말하는 법을 배우고 일하고 우정을 쌓고 신실함을 익혀가도록 하십니다.

신앙의 적용: 교회의 여정과 네가지 원칙

지난 한 해에 우리 희년교회 발자취를 보면서 우리는 굉장히 우리들의 발자취가,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이집트로 가는 그 발자취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희망: 우리들은 그들과 같이, 현실을 직시하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동반자: 우리는, 쉽게 말로 위로하려고 하기보다는, 사랑으로 곁에 서로 있는 그런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경청과 실천: 우리는 늘 조용한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고, 장기적인 플랜을 예측할 수 없을 때에도, 한 걸음 한 걸음 실천하는 용기와 성실성으로 일상을 봉헌하였습니다. 궁극적 신뢰: 우리는 신뢰, 모든 자리에 하느님께서 계시고 우리들에게 평안의 길로 이끌어주신다는 신뢰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앞으로 2026 년 우리의 삶은 어떻게 진행될까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마스터 플랜으로 주시진 않으시지만 우리 발 앞의 빛을, 약간의 빛을 주실 줄은 믿습니다. 2026 년도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되 하느님께 늘 희망을 가지고 또 서로가 쉽게 위로의 말을 하기보다는, 서로가 옆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조용히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결국에는 본향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면서 걸어가는 그런 복된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어려운 시간들을 많이 겪지만

2025년 4월 6일 사순5주일 (요한12:1-8)

어제는 밤에 산책을 갔더니 비가 온 거기에 벚꽃들이 아주 많이 피어있어서 아. 정말 너무나 좋았었고요. 긴 겨울이 지나고 이런 또 꽃을 또 우리들에게 보여 주셔서, 겨울에 지친 저희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 같으로 느껴졌습니다.

저희가 어려운 시간들을 많이 겪지만, 그런 때마다, 그 시대마다, 노래가 있고, 또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다정한 말이 있고, 또 집에 가면 몸에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양식이 있어서, 그 어려운 시간들을 겪으면서도, 여태까지 살아온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마리아는 어려운 상황을 지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 식구인 라자로가 죽었다가 살아났고, 그렇게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또한 이 집을 방문한 예수님도 죽음과 이별을 예고하는 삼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쪽으로 못 내려오셨어요. 왜냐하면 예루살렘 쪽으로 오면은 바로 체포가 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동쪽 문이 가까운 베타니아에는 오실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바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거기까지, 친구들을 만나러 오신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 일행이 어떤 심정으로 베타니아에 오셨는지는 제자 토마가 한 말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같이 가서 우리 스승님과 함께 죽음을 같이 합시다.” 이런 장면이 있는 걸로 봐서는 굉장히 각오를 하고 이 자리에. 왔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삭막하고, 죽음이 앞을 가리고 있는 이 장면에서, 마리아가 300 데나리온, 당시 노동자가 꼬박 1년 동안 먹고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액수라고 하지요. 요즘과 달리 그 당시에는 일반인들이 돈을 모으기는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정도의 가치가 되는 옥으로 된 병을 깨뜨려서, 그 향이 나는 기름을 다 쏟아부은 것이니까 어마어마했었을 겁니다. 그게 히말라야에서 나오는 나르드라고 하는 추출 허브라고 들었었는데요. 그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그곳에서, 온 방안을 그윽하게 채우고도 남는 향기가 퍼져나게 된 것이지요.

그 당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직감을 하신 거예요. ‘아 내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죽을 건데 그 내 장례식을 위해서 미리 장례식을 해주는구나.’ 요즘에 장례식을 생전에 미리 하시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심정을 알아주는 것에 대하여, 그렇게 느끼면서 고마워 하셨지요.

그 당시에 제자들도 그거 상황이 어렵다는 건 알았겠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필연적으로 잡혀서 돌아가실 것을 염두에 두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들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근데 마리아는 그것을 알고, ‘이제 며칠 있으면 잡혀가서 돌아가실텐데, 다 있어 봤자 뭤하나, 아끼고 아꼈던 향유 옥합을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하는 이 사람들과, 수난을 앞둔 예수를 위해 깨뜨리자’,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에게는 그런 꿰뚫어 보는 눈과 공감 능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의 헤아림과 행동이, 죽음을 직면한 그 순간을 더 소중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가 지금 이곳에 있는 이 순간도 사실은, 우리가 유한한, 죽음을 앞둔, 인간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겠지요. 언젠가는 오늘 무심히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아 이때는 참 우리들도 참 힘있고 고왔었네’라고 할 날이 있겠지요. 그렇게 흘러가는 순간이기에, 오히려 더욱더 어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짧고 유한한 우리의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이 마리아와 같은 그런 흘러 넘치는 향기까지는 못 되더라도, 정성을 다해 피어내는 향기, 자그마한 소망, 작은 친절 한 조각으로, 주변에 은은한 축복을 전하는, 그런 우리의 삶, 우리의 예배, 우리의 기도로, 우리가 있는 모든 곳이 항상 넘쳐나도록, 늘 힘을 주시도록 주님께 간절히 소원합니다.

[40일 광야 훈련에 용감하게 나아갑시다]

2025년 3월 2일 사순전주일


오는 수요일은 제의 수요일이고 이제 우리들은 40일 동안의 광야 훈련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40일이 오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전투 준비를 하라고, 오늘 이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묵상하도록, 교회력의 성서 정과는 ‘주님의 놀라운 변모’를 묵상하도록 초청합니다. 이 신비롭고 감동스러운 순간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바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모진 수난을 당하는, 그 고난의 시기에 그들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추운 나라, 몽골에 몇 번 가본 적이 있는데요. 거기 선교사들 사이에 하는 말이 있어요. 몽골에는 7월, 8월 9월에 꽃이 한 200 종류가 피어난대요. 그리고 정말 들판도 예쁘고 사람들도 나와서 즐겁게 지내고 그러는 시절인데, 이 계절에 몽골에 처음 온 선교사들은 한 7년, 10년도 잘 버틴대요. 근데 꽁꽁 언 겨울날, 맨날 땅도 하늘도 꽁꽁 얼어있는 그런 때 온 선교사들은 추위에 질려가지고 한 일 년쯤만 지나도 ‘아 집에 가고 싶다’ 이러고 힘들어한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선교사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 아름답고 정말 꽃 피는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 길고 어두운 계절을 견디는 힘이 된다는 것을 실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러한 신비한, 꿈과 같은 신앙의 체험은, 개화기에 처음 신앙생활을 했던 세대들에게서도 많이 나타납니다. 어떤 나이 드신 분의 말씀을 들으니까, 당신 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가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어, 그 옛날에 뭐 신주단지라고 해서 쌀 같은 거 넣어놓고 조상이라고 절하고 그러던 게 있었나 봐요. 그런 것들을 다 꺼내가지고,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다 불 살라 버렸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 문중에서 ‘저런 이상한 놈이 있나’ 그래가지고 내쫓아서, 아들 둘 8명 데리고서 쫓겨나서 갈 데가 없으니까 숭실대 앞에 조그맣게 국박집을 하여, 그 자식들 정말 잘 교육을 시켜 훌륭하게 장성하게 했다는,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신앙의 초창기에 이겨내신 분들에게는 극적이고 생생한 체험이 있었지요.


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한 2시간 걸어야지 교회 갔는데, 그 때는 매일 새벽 예배가 네시잖아요. 그러니까 두시 경부터 일어나서 매일 교회에 나가 기도를 하고 오는 거죠. 그렇게 매일 기도를 하러 가는데, 어느 눈이 많이 온 날 호랑이가 마주친 거예요. 그래서 야 이제 죽었구나. 여기서 그냥 죽기 전에 기도라도 하자 그래가지고 거기 막 땀을 흘리면서 이렇게 기도를 했대요. 그러다 보니까 날이 밝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진짜 호랑이 때문에 정말 죽자 사자 기도하고, 그런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런 생생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한 세대, 두 세대, 세 세대, 네 세대 이렇게 내려가면, 그 집안이 정돈이 돼서 참 뭐 우여곡절도 없고 잘 모든 것이 그렇게 된 있지만, 모태신자(못해신자)라고 하는 자조적인 표현에도 있는 것처럼 그냥 신앙생활이 뜨거운 것도 아니고 차가운 것도 아니고 체험적인 것도 별로 없고 이런 식으로 좀 변하는 면도 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영성가들이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은 흐름인 것 같아요. 하느님을 처음 알아갈 때는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감미로운 그런 체험을 허락하셔서 우리의 열정을 뜨겁게 불러일으켜 주시지만, 우리의 신앙 생활이 이유식을 마치고 단단한 음식을 먹게 되었을 때는, 무미건조하고 단단한 그런 꾸준한 신앙 생활이 계속된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그런 감격적인 선물을 주실지, 우리들에게 무미건조한 하루하루의 일상생활을 허락하실지, 그것은 하느님께서 택하실 일이지만, 우리는 갈망해야 될 것은, 감미로운 체험이 아니라, 주님께서 옆에 계시고 그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는 것, 그것이어야 합니다. 어떤 느낌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꾸준히 함께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되새겨야겠습니다.


이제 사순절 시작하는데요. 어떤 주일학교 선생님이 야 우리. 사순절 동안에 자기가 좋아하는 거 하나씩 안 하도록 하자. 그래가지고 자기는 초콜릿을 너무 좋아하는데 초콜릿을 40 동안 안 막 그랬다는 거예요. 그랬다가 40 동안 내내 ‘내가 다음에 또 초콜릿 안 먹는다고 얘기하라 봐라’ 그러면서 너무너무 고통스러워했다고 하더라고요.


여러분들의 생활을 바꾸고, 정말 흘러가는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사소한 데서부터 뭔가를 시도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주님께서 하늘에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모습을 기억하고, 또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께로부터 힘을 얻었던 그런 놀라운 체험들을 기억하면서 그 어려운 순간들을 잘 이겨내면서 이 복된 사순절의 신앙생활에 용감하게 나아가시고, 또 우리들의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어려움과 근심 속에서도, 주님의 힘을 얻어서 어 극복해 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수님의 표정]

2025년 2월 23일 연중7주일


얼마 전 밖에서 돌아온 딸이 ‘밖이 추워’라고 저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저는 ‘나도 알아’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것은 딸이 낸 시험문제였습니다. 기대했던 답안은 ‘추웠겠구나’였다고 하네요.

지난 주말에는 노원 상계 나눔 교회의 강촌 피정에 동행하여 묵주기도를 드리고 왔습니다. 현관 근처에는 ‘웃으시는 예수님’을 그린 스케치가 담긴 액자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예수님의 표정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일 복음 말씀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오늘 복음 본문 중 몇 구절이 당시 로마 군대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당시 최강의 군대로서 유대지방 일대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대에는 현지인에게서 물건을 징발할 권한, 부역을 시킬 권한, 채벌할 권한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너무 가혹해져서 현지인의 반발을 사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제한 규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들면 의복에 관하여, 밤 기온이 현저하게 떨어져 의복이 없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점을 감안하여, ‘옷을 징발할 때에는 속옷은 남겨둬야 한다’라거나, 현지인을 때릴 때에는 ‘한 손으로 때릴 것이지 대놓고 양손으로 구타하지 말라’라든가, 물건을 운반시킬 때에는 얼만큼 거리의 한계를 정하여 노역을 시키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로마 군대의 징발, 부역 채벌 등이 자주 발생하였다면, 당시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설명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을 구타한 로마 병정에게 ‘이쪽도 때려 주시지요’라고 하는 사람과 또 ‘어쩔줄 몰라하는 로마 병정’을 상상하면서, 흥미 깊게 이야기를 경청하게 되었겠지요.

그러고 보니, 현대의 우리들은 예수님 말씀의 해석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너무 머리로만, 설명으로만,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눈물과 연민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공연히 별 이유도 없이 당시로서는 귀한 겉옷을 빼앗기고, 길을 가다가 갑자기 불려가 허덕이며 먼 길을 기진맥진 무거운 짐을 나르고, 맘에 들지 않는다고 뺨을 때리면 아무 말 없이 맞아야만 하는, 그런 많은 사람들의 삶에 대한 예수님의 안쓰러움과 위로하고 싶은 심정은 뒤로 한 채, ‘그리스도인의 생활 윤리’ 또는 ‘비폭력 방식’ 등의 무표정한 일반화를 하려 하지 않았나 돌이켜 봅니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 항상 그분께 나아갑니다. 사랑과 자비가 한이 없으시고, 우리의 고생하고 염려하고 아파하는 것을 안쓰러이 바라보시는 주님,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신”(35b)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우리는 피곤하고, 분주하고, 사는 것이 힘들어서 기도하기가 힘들다고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러한 우리를 조건 없이 받아 주시는 주님께 나아가 우리의 마음을 열고 고백하며 그분에게서 힘을 얻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인자하심이 여러분과 저에게 일평생 함께하기를 빕니다.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 하느님의 자비와 지혜를 받아들이며]

2025년 2월 16일 연중6주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와 사람들 한가운데 서 계십니다. 그분은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고, 우리의 고통과 희망, 그리고 아픔 속으로 직접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가치관을 흔들고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말씀을 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지금 주린 자들은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를 것이다.” 이 말씀은 단순히 상황이 역전될 것이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은 진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고 있으며, 세상의 권력과 안전을 우선하는 구조를 흔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자체가 선하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부와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을 열어 하나님께 기대는 이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임재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팔복의 말씀은 우리가 자신의 힘과 소유보다 하느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화 있으리라’라는 경고의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부나 기쁨을 거부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로부터 멀어질 위험이 있다는 점을 경고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며 살아갑시다.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하고, 세상의 가치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에 마음을 활짝 여는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이 짧은 설교는 영어 예배의 설교문입니다. 참고하시도록 원문도 올려 드립니다.)


The Blessings of Dependence:
Embracing God’s Mercy and Wisdom

Today’s Gospel gives us a powerful moment. Jesus comes down from the mountain to be with the people in their struggles, hopes, and pain. He does not stay apart but steps right into their lives, speaking words that challenge, unsettle, and reshape our understanding of the world.

Blessed are you who are poor, for yours is the kingdom of God. Blessed are you who hunger now, for you will be satisfied. These words are not just about reversing fortunes but revealing a greater truth—God’s kingdom is already at work, disrupting systems that favour the powerful and secure.

Jesus is not saying suffering is good. He is showing that those who are open, vulnerable, and not protected by wealth and status can receive God’s presence most fully. The Beatitudes call us to trust in God rather than in our own resources.

Then come the ‘woes’—difficult warnings. Not because God rejects wealth or happiness, but because when we think we have everything, we risk shutting ourselves off from God’s mercy and justice.

Let us remember that we are passing through this fleeting world, fragile and dependent on God’s grace. May we live with gratitude for his mercy, opening our hearts to his compassion and wisdom that surpass the values of the world. Amen.

[새 아침 밝아 종달새 우네]

2025년 2월 9일 연중5주일


얼마 전에 유튜브를 보니까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는 여자분 소개가 나오는데, 그분은 정말 살림을 깔끔하게 잘 하시는 거예요. 그분이 군인의 아내인데, 부대의 조그만 아파트이지만, 부대의 장교들 모임이 끝나면 사람들이 그 집으로 모인다고 해요. 언제 찾아 가도 항상 깨끗하고 넓고 그래서 간다고요. 저하고 비교를 해보니까 저는 그렇지가 못하거든요. 그래서 누가 온다고 그러면은, 열심히 치워야 되고, 그것도 한참 정리를 해야 하는 정도인데요.

여러분은 좀 어떠세요? 공동체 생활하시니까 아마 서로 왔다 갔다 하고, 그러니까 아무 때나 오고 가고 할 수 있게 깔끔하게 하시고 살 것 같은데요. 웃으시는 거 보니까 그러신 것 같아요.


아마 베드로의 심정이 그런 심정이었을 것 같아요. 자기가 이렇게 살고 있는 집에 갑자기 누군가가, 그것도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찾아오신다고 한 경우처럼, 베드로는 그렇게 당황을 한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귀염성이 있었던 것 같아요. 베드로는 고기를 잡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시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물 속에 뛰어들었다고 하지요. 또한 변화산상에서도 당황을 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로 ‘예수님, 우리 천막치고 여기서 계속 삽시다’라고 했던 것도 베드로였지요. 생각해 보면 수줍음도 많이 타고 좀 귀여운 행동을 많이 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오늘의 1독서(구약)를 보면, 그런 사람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라고 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도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느님의 제단 위에 천사들이 날아다니면서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외치는 하느님 현존의 신비를 마주한 그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사는 사람인데 하느님을 봤다니 이거 죽는 거 아니야’ 이러면서, 허둥대었습니다.

그런데, ‘주여, 내게 오심을 감당치 못하니’ 하며 당황했던 이 두 사람들의 응답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갖고 있는 배와 그물, 전 재산을 다 물가에 놔둔 채로 예수님이 따라갔습니다. 이사야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도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그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시기에, 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새로운 길로 인도하는 그런 어려운 일을, 감당하겠다고 이렇게 하느님 뜻에 승복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역사에 이사야나 베드로와 같은 시대에 그런 처지에 있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을 해보면, 여러분들은 그 베드로나 이사야보다는 훨씬 더 잘 하셨을 거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런데요.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우리가 예수님이나 하느님을 그렇게 볼 수 있는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 한번 여쭤보고 싶습니다. 그런 신비를 체험한 적이 있습니까? 오늘 베드로와 이사야가 겪은 것 같은 신비의 체험을. 저도 이제 생각을 해보니까 참 그런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스스로, ‘관상기도를 열심히 한 사람도 아니고 또 금욕적으로 이런 사람도 아니고 신비 체험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와 이사야의 경우도 그 사람들이 노력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느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베드로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께서는 만난 모든 사람들을 불러 주셨는데, 대부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채리지 못했는데, 그것을 알아채렸다는 점에서 베드로(와 이사야)의 특별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런 게 있지 않나 궁금히 생각해 봤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매일 아침 태양이 떠오를 때마다 그런 생명과 소명이 우리에게 오고 있지 않나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성가 102장에 새 아침마 밝아 종달새 우네 그런 노래 있죠. 그래서 주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그 첫날, 첫날에 찌르레기가 우는 것 같은 그 소리를 오늘 아침에 듣는다 이런 가사로 시작하는 그 노래인데요. 우리들의 매일 아침마다 우리가 이런 베드로가 하느님을 만나고, 이사야가 하느님을 만나던, 그 신비가 우리들에게, 임하실 줄 믿습니다.


그 신비는 주님의 현존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매일 아침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성찬의 식탁에 나올 때마다, 숨쉬는 시간마다, 우리들에게 힘을 내라고, 그리고 또 지치지 말라고,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으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은, 사람들과, 금전과, 또 건강 문제와, 꿈과, 이런 모든 것이 실타래처럼 얽힌채, 우리를 흔들고 지치게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주님의 손길을, 오늘의 베드로와 이사의 말씀 속에서, 묵상하면서 그 사람들처럼 새로운 힘을 주님에게서 얻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다림은 인내와 희망의 혼합물]

2025. 2. 2. 주의 봉헌 축일


오늘 복음서에서 묵상한 ‘성 시므온 성가’는 30년 전 신학교 채플에서 매일 까만 옷을 입고 동료들과 저녁 때마다 드리던 기도의 시간을 떠오르게 합니다. 우리는 매일 저녁마다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주의 종을 평안히 돌아가게 하시는도다.
주께서 만민 앞에 세우신 구세자를
내 눈으로 친히 뵈었나이다.
이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시요
이스라엘의 영광이로소이다.


매일 저녁 시므온 송가를 부르는 이 전통은 수도자들의 저녁 기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 시간에, 하루의 일상생활에서 만난 주님을 감사하며, 휴식을 준비하는 고요한 이 노래는 우리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 줍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인생을 마감하는 엄중한 시간에도, 그동안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이런 평안한 노래를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영광스러운 축가를 부른 시므온은, 근심어린 어조로 ‘가슴을 찌르는 고통’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감탄과 염려가 공존하는 순간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삶은 축복과 고난, 생명과 죽음이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 뿐 아니라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오래 전에 15일 피정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조용히 있다 보니, 더욱 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게 되고, 그러고 보니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인생의 회한과 아쉬움이 떠올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의 인생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인생이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 그런 눈으로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또한 가까운 분들의 인생 속에도, 기쁨과 영광의 순간과 함께, 회한과 억울함과 고생의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고생을 많이 하며 살았던 아버지, 어머니의 기억을 되살리다가, 그 나이를 보니 30대 밖에 안 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감사한 세월이었지만 또한 세상의 물결 속에서 고생한 세월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곳에 함께 하신 여러분의 인생은 어떠했나요? 어떠한 기분으로 보았는가에 따라서 아쉬움과 감사가 교차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을, 오늘의 본문을 묵상하며 하게 됩니다.

신앙의 눈은 이러한 흙과 같은 인생의 진실과 연약함을 직시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걱정과 연약함을 주님께 고백하고, 시므온과 안나처럼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은 인내와 희망의 혼합물입니다. 인내는 고통을 참는 것입니다. 영어에서 환자라는 단어가 ‘인내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라고 한 내용은, 원래 ‘이스라엘의 위안’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고난과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추운 겨울에 오지 않는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떨고 서 있었는데, 결국 멀리서 오고 있는 버스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인내와 희망은 상황을 극복하는 힘이 됩니다. 그렇게 기다림으로 주님의 구원, 주님의 위안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허약한 자기 연민과 회한을 넘어서야 합니다. 신앙인은, 후회하고 절망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사하고, 극복하고, 초월하고, 싸우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고비길에 지금 어떤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까? 지금 어려움이 있더라도, 심지어, 죽음의 엄중한 고난이 앞을 가려도, 우리는 시므온과 안나처럼, 희망을 품고 기다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기다림의 끝에 ‘이제 이 종을 평화 가운데 나아가게 하시나이다’라고 하는 겸손와 감사의 신앙생활에 더욱 깊이 이르기를 바랍니다.

[선포는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2025. 1. 26. 연중3주일


열심히 하려고 하면 더 안 되는 게 많이 있습니다. 노래 부를 때도 제가 열심히 하려고 목에다 힘을 주면 목소리도 잘 안 나고요. 자연스러운 울림도 안 나고 또 글씨도 제가 꽉꽉 눌러서 쓰는데 꽉꽉 눌러서 쓰다 보면 글씨가 참 더 엉터리가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슥슥 문질러지게 쓰면 훨씬 더 잘 써지는 것 같습니다. 악기도 그렇게 약간 뿌연 소리를 내려고 하면 오히려 명쾌한 소리를 내려고 할 때보다 더 풍성한 소리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설교도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준비가 너무 안 돼 있어도 문제지만 너무 과해도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설교로, 딱 한 줄 설교를 하셨는데, 정말 그렇게 장황하지 않은 설교를 준비하려고 해도 자꾸 욕심이 생기고 자꾸 태도가 경직되는 것을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복음 선포가 무엇입니까? 고대 사회에서는 주로 새로운 왕조가 형성됐을 때 그 왕조의 수립의 정당성을 얘기하거나 앞으로 이런 식으로 정책이 바뀔 거라든가 이런 것들을 담고 있는 게 선포였죠.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3.1독립선언이 하나의 선포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일본천왕이 항복선언하는 거 라디오에 나오는 거 나오잖아요. 또 예를 들면 대한민국 초기의 토지개혁 법령도 그런 예이지요. 동북아시아가 굉장히 근대화가 빨리 이루어졌는데 그 초석이 되는 토지개혁령이 발표되는 순간, 토지소유에 대한 원칙이 확 바뀌어가지고 경자유전으로 돼서 엄청난 큰 변화가 일어나죠. 이런 것들이 바로 선포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또 저희가 있었던 건 우리가 잠을 못 자면서 봤던 계엄무효선언 이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선포의 내용들인 것 같아요.

그래서 선포라는 것은, 적어도 저희가 주일날 교회마다 가서 10분 20분 또 길게는 40분 50분 들어야 하는 그런 지루하고 졸리는 종교적인 설교가 그런 선포는 아니었던 것 같고, 더 역동적이고 뭔가 좀 파괴력이 있는 그런 것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선포는 굉장히 간단합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냐면 오늘 이 성서의 말씀이 너희들 가운데 이루어졌다 라고 얘기하는데. 그건 뭐냐면, 갇혔던 사람들이 자유롭게 되고 억눌린 자가 자유로웠고 배고픈 사람들이 배부르게 되고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날이 돌아온다라고 하는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얘기인데 사실은 이게 예수님의 회당에서 자리에 앉으셔서 얘기하신 이 내용은 마치 새로운 왕조를 형성한 왕이 이런 원칙으로 내가 다스리겠다라고 하는 하나의 왕위 즉위, 왕조 수립의 선언을 하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법적인 강제력이 생긴 다음에 법에 대한 선포를 하는데 예수님의 방법과, 성경에 나온 방법들은 그 반대 방향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먼저 그 법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먼저 생겨나고 변화는 그것에 뒤따라오는 식으로, 그렇게 모든 것들이 바뀌어 나갑니다. 마치 홍해가 갈라진 다음에 건너가야 되는데, 홍해가 갈라지기도 전에 몇몇 사람들이 그쪽으로 전진해 들어갔을 때 나중에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것이죠.

굉장히 무모해 보이고 약해 보이지만, 그것으로 서양사가 전체가 바뀌고 인류에서 굉장히 소중한 유산들이 기독교를 통해서 나온 걸 보면 이 방법이 굉장히 획기적인 방법인 것 같습니다.


요즘에, 그에 비해서, 언론에는 기독교가 그렇게 안 좋게 비춰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동안 기독교가 이 세계에서 한 공헌이 많은데, 요즘 들어보면 너무 창피한 얘기가 많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히틀러 같다고 그러고 어떤 사람은 모택동의 행동대 홍위병 같다고 그러고. 오늘의 한국의 법률과 경제와 윤리와 정치와 문화는 굉장히 세련되고 고급스럽습니다. 고도화된 질서와 의사소통 방식으로 사회가 운영되고 있는데, 거기에 굉장히 야만적인 사람들, 폭력 만능주의, 반지성주의를 가져온 사람들에 대한 명단에, 기독교의 목사, 기독교 전도사들이 따라 붙는 것 같아요.

옛날에 제가 처음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복사기들이 좀 후져가지고 복사가 안 되면 주먹으로 팡팡 때려가지고 복사를 하고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는데 요즘에 몇 천만 원, 몇 억 원 하는 고급 장비와 컴퓨터 시스템이 잘 안 돌아 간다고 해서 주먹으로 막 치는 사람이 있으면 아마 해고가 될지도 모르겠죠. 그러한 폭력지상주의 이런 것들하고 기독교가 이렇게 연결되는 것은 왜인가라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한다고 하면 알맹이 딱 빼고,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명령한다고 하는 그 껍데기만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얘기하신 어조는 주로 친구와 같은 톤으로 얘기를 하셨지 로마 집정관이나 장군의 포고문과 같이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거 몇 번 안 되죠? 오늘 본문에서 나온 선포를 하셨고, 하느님 나라의 원리로 팔복을 선언하셨고, 그 나머지는 다 친구로서 이야기를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셨던 것을 우리가 압니다.


이대용 주교님이 옛날에 설교는 공동체의 대표 간증이다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간증이 뭡니까? 그냥 일반인으로서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을 나누는 거죠. 그래서 굉장히 그 말이 요즘에, 굉장히 다가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이 사회에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오히려 그 저변을 감싸는 우리의 대부분의 말은 따뜻함과 사랑과 공감과 그런 동등함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너무 일방적인 문화에 익숙해져 있어서 듣는 사람이 잘 생각할 수 있는데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다 구원을 못 받고 무식한 사람들이라 우리가 가르쳐줘야 돼 라고 하는 그런 오만한 태도를 우리들의 마음속에 내면화시켰기 때문에, 요즘에 우리 기독교가 제일 어떤 의미에서는 이 사회의 사고지구로 되지 않았나 하는 그런 반성을 해보았습니다. 듣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예수님의 소통 방식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았나 스스로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과 느낌을 존중하였던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의 법으로 우리의 공동체를 새로 만들어가고 우리들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우리들의 문화를 바꿔 나가야겠습니다. ‘이 사랑과 포용의 선물이 여러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예수님의 자비하신 선포를 내면화합시다. 이 선언이 우리들 가운데 변화를 가져와서, 한 사람 한 사람들의 생활에 새로움을 가져올 것을 믿습니다.

[사소한 일상 속에 만나는 하느님]

2025. 1. 19. 연중2주일


제가 신학교 1학년 들어갔을 당시 신학과에는 항상 1학년들이 논쟁이 있어요. 술을 마셔도 되는지 안 마셔도 되는지.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보수교단에서 왔기 때문에 술 마시는 거 굉장히 좀 싫어했는데 어떤 선배들은 술을 마시면 어떠냐고 도전을 하곤 하였죠.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 아무튼 술을 만든 기적이라고 하는 걸 보면, 예수님이, 어떤지는 몰라도 술을 안 마시는 분은 아니신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누가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 빵과 포도주는 우리나라에서 밥과 국하고 비슷하다. 그래서 그냥 제일 간단한 거 먹는 기분이 그런 거다 이렇게 얘기는 하더라고요.

이 구절을 보면서 항상 생각나는 것은, 비틀즈의 ‘렛잇비’가 생각이 나는데요.


렛잇비: 그냥 그렇도록 두어라,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무엇이든지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여라’ 이렇게 번역이 됐네요. 작가는 당시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 굉장히 죄책감도 느끼고, 막 그 절망에 빠졌는데, 하루는 그 어머니가 마리아의 모습으로 꿈에서 나타나서 그런 얘기를 했죠.

네가 할 수 없는 것들 가지고 고민하고 슬퍼하고 그러지 말고, 하느님께서 이 세계를 움직여 가시는 것을 봐. 그냥 놓고 봐. 네가 다 하려고 그러지 말고 이렇게 지혜로운 언어를 가르쳐줬다고 한 그 가사가 이 구절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얘기를 듣고 제가 굉장히 깜짝 놀란 적이 있었어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들이 굉장히 많지만, 사실은 이 세상이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도 많고 또 때로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들이 많고, 그런 것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선물로 다가오는 것을 우리가 보기는 보곤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그런 강박관념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교회가 오늘 교회의원회 저희가 했어요. 그래서 우리 교회의원님들이 작은 교회의 살림이지만 밖에 있는 뭔가 돕는 일을 선교를 열심히 하자. 그래서 선교에 대한 의논이 굉장히 많이 됐었거든요. 그래서 아무튼 그 교회도 외부에 선교를 많이 했는데 하면 할 수 없이 진이 빠지는 거예요. 해도 해도. 계속해서 할 일이 생기고 계속해서 다급한 일이 생기고. 그래서 그 어느 한 해는 거기에 그 신부님이 “우리 그러면 다 이거 중단하자. 중단해도 하느님께서 그 도와야 할 가난한 나라, 거기서 활동하고 계셔. 우리가 돈을 내야지만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게 아니야.” 이렇게 해서 한번 끊고 생각을 해봤더니 나중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그랬더니 나중에는 할 수 있는 만큼을 하다 보니까 전보다 더 많이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외부에 대한 활동을 할 때 기억하여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미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과 우리는 감사하면서 그것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시중 드는 정도로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좋다고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논의가 앞으로 하면서 많이 됐으면 좋겠지만 우리가 세상에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동력자로 참석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잘 시작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런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인간 생활을 하다 보면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아요. 우리는 또 상당히 기독교는 합리적인 사고를 중시하던 근대의 영향이 많아서인지, 무엇이든 매뉴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밥을 말아먹으면 밥을 이만큼 말아먹는 게 좋을까 그렇게, 매 순간순간에 이게 뭔가 매뉴얼에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교회 운영에서 만나는 사안들에 대해서도 분명히 어떤 규정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외부적인 어떤 척도를 계속해서 고민하는 적이 많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그러한 척도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이 느끼는 아주 미묘한 예와 아니오 사이에 있는 미묘한 그러한 느낌의 차이가 굉장히 중요한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는 명확하고, 예냐 아니오냐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순간에 우리들의 내면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재능에 의해서 느끼는 그런 미묘한 마음에 있는 것도 우리가 알게 됩니다. 현대까지는 복잡하거나 단순하거나 어떤 답이 정해진 경우가 많은 시대에서 살아왔지만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전혀 전에도 보지 못하고 복잡한 것들이 많이 있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들에게 맞는 진리에 대한 관점은 어떤 명시적인 어떤 말로 이루어진 그것들에 앞서서, 나 스스로가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에 더 초점을 맞추는 그런 신앙으로 우리들의 윤리와 도덕과 신앙의 교리가 변해갈 시대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 여기에서 나누는 짧은 짧은 서로의 대화와 일상에서 나누는 느끼는 하나하나의 교환 속에서, 더욱더 수준이 높아지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진리가 그러한 주님께서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활동하시는 그 속에서. 더욱더 우리들에게 잘 나타날 수 있는 그러한 깨어있는 우리들의 한 순간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어떤 재판관 같은 명료한 사고에서 한층 더 나아가, 예술가 같은 감성으로 승화된 진리 추구입니다. 서로 일상생활에서 겪는 미묘한 느낌들을 신뢰하고 나눌 수 있는, 그런 공동체로서, 우리들의 한 해를 잘 개척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용암처럼 분출하는 예수 스피릿]

2025. 1. 12. 주님의 세례 축일


예수님에 대한 복음 메시지에서는 시편의 노래와 춤이 배경음악처럼 흐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신 말씀은 시편 22편의 울림을 저희에게 전해 줍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들러온 ‘너는 내 아들이다’라는 말씀은 이사야 43장의 울림을 불러 일으킵니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성서 시대에 가까웠던 예수님 당시의 독자들은 마치 우리가 트로트나 K 팝 가사들을 알듯이 이 곡조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1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건져주지 않았느냐?
.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람이다.
2 네가 물결을 헤치고 건너갈 때 내가 너를 보살피리니
. 그 강물이 너를 휩쓸어가지 못하리라.
3 나 야훼가 너의 하느님이다.
.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내가 너를 구원하는 자다.
. 이집트를 주고 너를 되찾았고
. 에티오피아와 스바를 주고 너를 찾아왔다.


우리도 그런 떠올릴 노래가 있습니다.
저는 ‘힘들고 지쳐’로 시작하는 찬양곡을 알고 있습니다.


당시 공화정은 세습을 방지하기 위하여 로마 집정관 또는 대통령 후계자를 다른 집안에서 데려오는 관례를 유지했는데, 그 후계자 지명식에서, 이 사람은 나의 아들이다, 나의 딸이다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런 존귀와 권능을 지니셨다면, 우리도 그와 같은 존귀와 힘을 갖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 곡은 소리쳐 외치는 ‘락’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락 스피릿’에 대하여 ‘자신을 지탱해 온 힘’이자 ‘자신의 피를 끓게 만드는, 용암처럼 뜨거운 무언가’라고 했습니다(인용: “락스피릿이란 무엇인가” ohdeok). “클래식에도, 발라드에도, 재즈에도, 고3 수험생에도, 월급쟁이에도, 실망한 사람에게도 있는,” 이 도전의 힘이, 예수님 세례를 형상화한 이 곡 속에도 느껴집니다.

이러한, 죽음의 물에서 나와 의연히 서 계신 예수님과 같은, 변화의 힘, 분출하는 끈기와 생명력이 여러분의 한 해에 충만하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