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가복음 18:9-14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비유)
신앙과 기도에 대한 오해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친구들은 종종 저에게 종교에 관한 토론을 걸곤 했습니다. 마치 무지한 맹신에 빠진 기독교인과 과학으로 무장한 똑똑한 현대인의 대결처럼, 결과가 뻔한 논쟁을 벌이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신앙, 특히 기도는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인 행동으로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특히 이상한 주술행위를 하는 무당과 사이비 종교인들이 뉴스에 거의 매일 등장하는 요즘, 신앙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기도는 인간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
하지만 우리가 초자연적인 힘을 바라며 간구하는 것은 객관적인 세상의 법칙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만 하는 일이 아니며, 특정한 성격의 사람들만 하는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는 사람의 눈물과 같습니다. 저처럼 둔하고 정서적으로 메마른 사람도 가끔 드라마를 보다가 눈물이 글썽거립니다. 언제 눈물이 나올지 저 자신도 모릅니다. “나는 절대 안 우는 사람이야”라고 하던 사람도 어느 순간 눈물이 글썽거리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거대한 파도와 장벽 앞에 섰을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고, 하느님! 제발 도와주세요”라는 마음이 저절로 나옵니다.
신앙의 유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신앙의 유산으로부터 옵니다. 히브리 노예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외쳤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 믿음으로 그들은 앞에 놓인 홍해를 건넜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으로서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을 믿으시고 죽음의 장벽을 넘어서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이 오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사랑의 주님께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두 가지 태도: 교만과 겸손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사람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기도를 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의 문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은 “나는 완벽하다. 나는 하느님께 인정받을 만하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다 쓰레기다”라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다른 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지 않고서는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겸손과 감사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돌이켜 보면,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교만함을 물리치시고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갈 수밖에 없도록 연약함을 인간에게 주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바로 직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늘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교만의 극단과 배타성의 위험
그런데 일부 기독교인들을 보면 교만한 마음이 극에 달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조금 다른 기독교인들까지 악마라고 주장합니다. 며칠 전 시청 앞을 지나다가 WCC를 “레닌”이라며 척결해야 한다고 쓴 플래카드를 보았습니다. 그것을 내건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입니다.
같은 기독교인들도 혐오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편협하고 심술궂은 태도를 보일지, 쓴 웃음이 나왔습니다.
포용과 화해를 향하여
일주일 후면 경주에서 APEC 회의가 열립니다. 어떤 이들은 이 회의를 통해 그동안 가로막혔던 장벽들이 없어지고, 교역과 협력으로 서로 돕는 새로운 세계 질서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교류와 화해의 시대가 시작되든 되지 않든, 우리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마음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남을 정죄하고 선을 긋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다리를 놓아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고, 그들 속에서도 일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넓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변화되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