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26. 연중3주일
루가 4:14-21
14 ¶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셨다. 예수의 소문은 그 곳 모든 지방에 두루 퍼졌다. 15 예수께서는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셨다.
16 ¶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난 나자렛에 가셔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서를 읽으시려고 일어서서 17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는 대목을 펴서 읽으셨다.
18“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19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들던 사람에게 되돌려주고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예수에게 쏠렸다. 21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
열심히 하려고 하면 더 안 되는 게 많이 있습니다. 노래 부를 때도 제가 열심히 하려고 목에다 힘을 주면 목소리도 잘 안 나고요. 자연스러운 울림도 안 나고 또 글씨도 제가 꽉꽉 눌러서 쓰는데 꽉꽉 눌러서 쓰다 보면 글씨가 참 더 엉터리가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슥슥 문질러지게 쓰면 훨씬 더 잘 써지는 것 같습니다. 악기도 그렇게 약간 뿌연 소리를 내려고 하면 오히려 명쾌한 소리를 내려고 할 때보다 더 풍성한 소리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설교도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준비가 너무 안 돼 있어도 문제지만 너무 과해도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설교로, 딱 한 줄 설교를 하셨는데, 정말 그렇게 장황하지 않은 설교를 준비하려고 해도 자꾸 욕심이 생기고 자꾸 태도가 경직되는 것을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복음 선포가 무엇입니까? 고대 사회에서는 주로 새로운 왕조가 형성됐을 때 그 왕조의 수립의 정당성을 얘기하거나 앞으로 이런 식으로 정책이 바뀔 거라든가 이런 것들을 담고 있는 게 선포였죠.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3.1독립선언이 하나의 선포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일본천왕이 항복선언하는 거 라디오에 나오는 거 나오잖아요. 또 예를 들면 대한민국 초기의 토지개혁 법령도 그런 예이지요. 동북아시아가 굉장히 근대화가 빨리 이루어졌는데 그 초석이 되는 토지개혁령이 발표되는 순간, 토지소유에 대한 원칙이 확 바뀌어가지고 경자유전으로 돼서 엄청난 큰 변화가 일어나죠. 이런 것들이 바로 선포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또 저희가 있었던 건 우리가 잠을 못 자면서 봤던 계엄무효선언 이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선포의 내용들인 것 같아요.
그래서 선포라는 것은, 적어도 저희가 주일날 교회마다 가서 10분 20분 또 길게는 40분 50분 들어야 하는 그런 지루하고 졸리는 종교적인 설교가 그런 선포는 아니었던 것 같고, 더 역동적이고 뭔가 좀 파괴력이 있는 그런 것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선포는 굉장히 간단합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냐면 오늘 이 성서의 말씀이 너희들 가운데 이루어졌다 라고 얘기하는데. 그건 뭐냐면, 갇혔던 사람들이 자유롭게 되고 억눌린 자가 자유로웠고 배고픈 사람들이 배부르게 되고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날이 돌아온다라고 하는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얘기인데 사실은 이게 예수님의 회당에서 자리에 앉으셔서 얘기하신 이 내용은 마치 새로운 왕조를 형성한 왕이 이런 원칙으로 내가 다스리겠다라고 하는 하나의 왕위 즉위, 왕조 수립의 선언을 하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법적인 강제력이 생긴 다음에 법에 대한 선포를 하는데 예수님의 방법과, 성경에 나온 방법들은 그 반대 방향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먼저 그 법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먼저 생겨나고 변화는 그것에 뒤따라오는 식으로, 그렇게 모든 것들이 바뀌어 나갑니다. 마치 홍해가 갈라진 다음에 건너가야 되는데, 홍해가 갈라지기도 전에 몇몇 사람들이 그쪽으로 전진해 들어갔을 때 나중에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것이죠.
굉장히 무모해 보이고 약해 보이지만, 그것으로 서양사가 전체가 바뀌고 인류에서 굉장히 소중한 유산들이 기독교를 통해서 나온 걸 보면 이 방법이 굉장히 획기적인 방법인 것 같습니다.
요즘에, 그에 비해서, 언론에는 기독교가 그렇게 안 좋게 비춰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동안 기독교가 이 세계에서 한 공헌이 많은데, 요즘 들어보면 너무 창피한 얘기가 많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히틀러 같다고 그러고 어떤 사람은 모택동의 행동대 홍위병 같다고 그러고. 오늘의 한국의 법률과 경제와 윤리와 정치와 문화는 굉장히 세련되고 고급스럽습니다. 고도화된 질서와 의사소통 방식으로 사회가 운영되고 있는데, 거기에 굉장히 야만적인 사람들, 폭력 만능주의, 반지성주의를 가져온 사람들에 대한 명단에, 기독교의 목사, 기독교 전도사들이 따라 붙는 것 같아요.
옛날에 제가 처음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복사기들이 좀 후져가지고 복사가 안 되면 주먹으로 팡팡 때려가지고 복사를 하고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는데 요즘에 몇 천만 원, 몇 억 원 하는 고급 장비와 컴퓨터 시스템이 잘 안 돌아 간다고 해서 주먹으로 막 치는 사람이 있으면 아마 해고가 될지도 모르겠죠. 그러한 폭력지상주의 이런 것들하고 기독교가 이렇게 연결되는 것은 왜인가라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한다고 하면 알맹이 딱 빼고,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명령한다고 하는 그 껍데기만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얘기하신 어조는 주로 친구와 같은 톤으로 얘기를 하셨지 로마 집정관이나 장군의 포고문과 같이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거 몇 번 안 되죠? 오늘 본문에서 나온 선포를 하셨고, 하느님 나라의 원리로 팔복을 선언하셨고, 그 나머지는 다 친구로서 이야기를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셨던 것을 우리가 압니다.
이대용 주교님이 옛날에 설교는 공동체의 대표 간증이다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간증이 뭡니까? 그냥 일반인으로서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을 나누는 거죠. 그래서 굉장히 그 말이 요즘에, 굉장히 다가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이 사회에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오히려 그 저변을 감싸는 우리의 대부분의 말은 따뜻함과 사랑과 공감과 그런 동등함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너무 일방적인 문화에 익숙해져 있어서 듣는 사람이 잘 생각할 수 있는데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다 구원을 못 받고 무식한 사람들이라 우리가 가르쳐줘야 돼 라고 하는 그런 오만한 태도를 우리들의 마음속에 내면화시켰기 때문에, 요즘에 우리 기독교가 제일 어떤 의미에서는 이 사회의 사고지구로 되지 않았나 하는 그런 반성을 해보았습니다. 듣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예수님의 소통 방식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았나 스스로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과 느낌을 존중하였던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의 법으로 우리의 공동체를 새로 만들어가고 우리들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우리들의 문화를 바꿔 나가야겠습니다. ‘이 사랑과 포용의 선물이 여러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예수님의 자비하신 선포를 내면화합시다. 이 선언이 우리들 가운데 변화를 가져와서, 한 사람 한 사람들의 생활에 새로움을 가져올 것을 믿습니다.
